한국에 와서 더 진화한(?) <기생수: 더 그레이>

한 사람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自我)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는 어지간해선 실패하지 않는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야기에서건 기본적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지점은 캐릭터가 (자신 내부에서든, 아니면 외부에서든)갈등을 겪으면서 변화하는 때인데, 이중인격 캐릭터라면 그런 극적 구성을 다소 수월하게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

다른 한편으로, 이중인격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선 십중팔구 그 두 자아는 처음엔 서로를 부정하고 충돌하지만 결국엔 모두가 이 상황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란 걸 인정하게 된다. 이 괴로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주인공이 스스로 파국을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가 이 장르의 대표 레퍼런스인 <지킬박사와 하이드>라고 한다면, 두 자아가 위태로운 동거를 이어가는 이야기가 바로 <헐크>다.

2024년 4월5일 넷플릭스 코리아의 오리지널 콘텐츠로 공개된 <기생수: 더 그레이>를 이야기하면서 굳이 이중인격을 언급한 점에 대해, 이와아키 히토시 작가의 원작 만화를 알고 있는 이라면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원작 만화 <기생수>는 이중인격이라는 테마와는 거리가 있는데,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미상의 생물이 주인공의 오른손에 그야말로 ‘묶여버리면서’ 불안한 공생 관계를 하게 된다는 내용이기 때문. 주인공과 오른쪽이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광경은 마치 만담 콤비의 그것처럼 느껴질 정도.

만화든, 웹툰이든 아니면 애니메이션이든 원작이 따로 있고 이를 실사화한 경우 그 결과물은 원작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기생수: 더 그레이>의 경우 다소 특이한 점이라면 원작의 스토리는 본국(일본)에서 이미 진행 중이고, 원작과 비슷한 시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핀오프.

<기생수: 더 그레이>는 원작 <기생수>의 스핀오프

<기생수: 더 그레이>에서 주인공 수인(전소니)에게 기생한 기생 생물도 다소 불안한 상태로 동거를 이어간다는 점이 일견 원작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두 자아는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한다. 수인은 처음엔 기생 생물을 아예 인식조차 못하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는 수준이다. 물론 나중엔 서로가 서로를(엄밀히 말하자면 수인이 자신의 몸에 의탁한 생물을) 알아보고, 서로 다른 자아가 수인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순간을 빌어 서로가 서로에게 필담을 나누는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긴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원작보단 오히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더 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바로 그런 이유 덕분에 작품 내에서 수인의 몸에 기생하는 생물은 ‘하이디’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전체 에피소드 6편으로 공개된 <기생수: 더 그레이> 1시즌은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군더더기 없이 진행된다. 특히 기생수가 다양한 형태의 ‘무기’를 이용하여 벌이는 액션 장면이나 화끈한 체이싱 장면 등은 꽤 세련된 모습이다. 특히 교량 위에서 여러 기생수들과 대(對) 기생수 특수부대인 더 그레이가 펼치는 액션 장면은 의외로(?) 꽤 스케일이 크다. 어느 모로 보나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전작 <정이>에 비하면 그야말로 진일보한 모습.

준수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도 멋졌다. 주인공 수인 역 전소니는 개인적으로 처음 봤던 <악질경찰>에선 (배역 탓이겠지만)뭔가 뾰족(?)하고 성마른 느낌이었는데 불우한 본작에선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고서 희망도 꿈도 없이 살아가는 젊은이의 모습을 잘 보여준 듯. 강우 역 구교환도 특유의 대사 톤으로 이야기 진행의 텐션을 스스로 조절할 정도.

다만 더 그레이의 최준경 팀장 역 이정현은, 배우 스스로의 해석인지 감독의 디렉팅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혼자서 다소 튀는 게 영 어색했다. 특히 초반, 남일경찰서에서 기생수에 대해 브리핑을 할 때는 굳이 그렇게 쇼맨십 가득한 모습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느낌까지 받았으니.

강우(구교환)와 수인(전소니)의 케미는 인상적

그 외에도 의아한 부분이 있는데, 그래서 <기생수: 더 그레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드라마의 맨 처음엔 온갖 방법으로 지구를 더럽히고 있는 인간(문명)의 맨 얼굴을 고발하면서 ‘결국 기생수나 인간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라는 말을 하는가 싶더니, 가면 갈수록 주로 활극이 펼쳐지는 부분에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주제의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작정하고 만들어진 프로파간다가 아닌 이상 그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기생수: 더 그레이>는 나름 새로운 해석의 여지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작 만화는 하도 예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아무튼 원작에선 기생수들(엄밀히 말하자면 기생수들의 완전한 숙주가 된 인간들)이 모여서 일종의 조직을 이루거나 하는 건 본 기억이 없는 듯하다. 반면 <기생수: 더 그레이>에선 최종보스 격의 인물은 권목사의 입을 빌려 “인간이 우월한 것은 집단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놓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나아가선 아예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겠다고(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집단의 우두머리를 해치고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하니, 감정은 없고 생존의 본능만 남은 기생수들이 한국에 넘어와서 진화(?)한 것일까?

엔딩 부분에서 최준경 팀장과 만나 ‘기생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르포라이터’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며 악수를 위해 오른손(!)을 건네는 일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이마를 탁! 하고 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원작과 스핀오프가 만나게 되는구나. 그리고 아마도 새 시즌을 기약할 수 있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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