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진짜 용의 해!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푸른 용의 해’를 맞이하며,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새해가 되면 으레 여러 미디어에서는 해당 해의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말하곤 한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요건 서기(西紀) 1월1일보다는 음력으로 새해가 되는, 즉 설날에 해야 옳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2024년의 경우 갑진년(甲辰年)으로, 푸른 용의 해라고 한다. 여기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트리비아를 한 가지 덧붙인다.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캐릭터, 홍길동이 등장하는 <홍길동전>을 보면 길동의 아버지 홍아무개 재상은 대단한 길몽을 꾸고선 아들을 갖게 되는데 그 길몽이 바로 푸른 용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이었다.

아무튼 이제 설날도 됐고 했으니 ‘진짜’ 용의 해를 맞은 기념으로(?) 용이 등장하는 작품을 보고는 2024년 설날 주간에 보리스 매거진의 취향 코너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그 작품은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디즈니 작품이고 지난 2021년에 극장 개봉 후 현재는 디즈니 플러스 채널에서 시청할 수 있다.

사실 3년 전에 처음 예고편이 공개되었을 때 나름 흥미를 느껴서 극장에서 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극장에선 금방 내려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아니면 당시에 볼 만한 시간대엔 자막판보다 더빙판만 상영 중이었을 수도 있고.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 흥미를 느꼈던 이유는 이 작품이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동남아시아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동남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쿠만드라’라는 이름의 왕국이고,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도 할 수 있는 드래곤도 나오는 만큼 장르 자체도 판타지 드라마라고 할 수 있지만.

※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 나오는 ‘시수(Sisu)’란 이름의 ‘드래곤’은, 세계 각국의 신화에 나오는 용(龍)과 비슷하지만 엄밀하게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사실 용이란 존재 자체가 상상 속의 존재이기도 하고 특히 서양과 동양 문화권에서 각각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무척이나 다른데(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특히 동북아에선 매우 상서롭고 신비한 대상이지만 서양에선 악마의 화신 같은 느낌이어서 이미지가 매우 부정적이다), 본 작품 속 시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신화에 나오는 ‘나가(Naga)’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덧붙여 동남아 지역 일부에선 아예 십이간지 중 용에 해당하는 동물이 ‘나가’로 대체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 지역 신화에 자주 나오는 ‘나가’를 모티브로 한, ‘시수’

작품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남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그런데 정작 동남아 지역 관객들이 어떻게 느꼈을지는… 글쎄올시다) ‘쿠만드라’란 이름의 가상의 왕국에는 옛날에 사람들과 드래곤들이 공존하던 역사가 있었다. 여기에 사람들을 돌로 만들어버리는 악의 존재 ‘드룬’들이 밀려들자 드래곤들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드룬들을 물리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다.

그 드래곤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보석의 형태를 띤 ‘드래곤 젬’이 되었고, 주인공 라야가 속한 ‘심장’ 부족(쿠만드라는 드래곤의 신체 각 부위인 ‘심장’, ‘꼬리’, ‘척추’, ‘발톱’, 그리고 ‘송곳니’ 등의 이름을 가진 다섯 개 부족으로 쪼개져 있다)에서 이 젬을 수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모종의 이유로 뿔뿔이 흩어진 이 다섯 부족의 화합과 나아가 쿠만드라의 발전을 꿈꾸는 라야의 아버지 벤자 부족장은, 각 부족의 족장들을 모아 평화 협정을 맺고자 한다. 그런데 송곳니 부족의 여왕 비라나와 그 딸인 나마리는 신성한 드래곤 젬을 직접 차지할 생각을 하고, 그 와중 젬이 깨지면서 드룬들이 부활하여 쿠만드라 전체를 위험에 몰아넣는다. 드룬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돌로 변해버린 수 년 후, 라야는 마지막 드래곤을 찾아 드룬에 맞서는 한편 쿠만드라 전체를 구해내고자 한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역시 이국적인 배경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와 같은 동아시아 지역에 속하면서 실제로 ‘그 쪽’에 가본 건 필리핀 딱 한 번밖에 없는 방구석 아싸(…)의 눈에 동남아 지역이 이국적으로 느껴진다는 건 어떻게 보면 역(逆) 오리엔탈리즘이나 엑조티시즘에 해당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전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그렇지만 고증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은 듯하다. 동남아 지역에 항상 눈발이 휘날리는 동네가 있다니? 어디까지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 라야는 다른 디즈니의 공주님들과는 다르게 상당한 실력의 검술과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그 무술의 동작을 봤을 때 주로 동남아 지역에서 성행하는 무술을 기반으로 해서 액션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싸움도 잘 하는, 씩씩한 공주님 라야

게다가 라야 역 성우는 일부러 베트남계인 켈리 마리 트란(<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에서 로즈 티코 역을 맡은 그 배우)을 캐스팅했다. 본 작품과 같이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했으나 디즈니 희대의 망작(?)이 된 실사판 <뮬란>에 비하면 여러 모로 진일보한 모양새. 물론 주인공 라야를 제외한 다른 캐릭터들(의 목소리 연기를 맡은 성우들)은 거의 모두가 동남아시아가 아닌 동북아 출신이나 혈통(시수 역 성우는 아콰피나, 라야의 아버지 벤자 역 성우는 다니엘 대 김, 나마리 역 성우는 젬마 챈 등)이라는 사소한(?) 문제는 있지만. ^^;;;

디즈니의 작품답게,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주인공이 여러 시련과 고난을 겪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선 그 모든 어려움이 해결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척을 지었던 사람과 사람, 부족과 부족 모두가 화합을 하게 된다는(혹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도 전달하고 있다. 결국 뻔하긴 한데, 그래도 나름 감동을 준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모두의 화합을 위해 말 그대로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있지 않은가.

한편 본 작품의 이야기에 대해 비판할 구석이 없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작품 속 왕국인 쿠만드라가 동남아시아 지역 전체를 축소해놓은 공간이라고 한다면, 그 넓은 땅의 그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정말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하나로 통일된다는 게 얼마나 얄팍한 생각이냐는 것이다. 나아가서 동남아 지역에선 태국만 빼고 모든 나라들이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사실까지 돌이켜보면 이는 굉장히 위험한 제국주의적 발상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런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론 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부족이자 나라라곤 하지만 어차피 다 같은 언어(물론 영어 ㅋㅋㅋ)를 쓰고 있고, 서로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사이가 나쁜 부족들이 외부의 거대한 악에 맞서기 위해서는 서로 똘똘 뭉쳐야 한다는 교훈까지 주고 있으니.

흥행 기록은 어떤가 해서 좀 찾아보니 미국에서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성공했다고 하기는 힘든 수준이었던 듯하다. 그래도 디즈니 플러스 채널을 통해 공개된 후 전 세계의 가입자들 사이에선 나름 관심을 모은 것으로 보이기도.

2024년 설은 연휴가 제법 긴 편이어서 가족끼리 모이는 일이 조금은 더 많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이런 집 별로 많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3대에 속하는 가족이 모두 모여 거실 TV를 시청할 일이 생긴다면, ‘모두의 디즈니’ 모토에 잘 맞는 작품이 될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을 추천한다. 누가 뭐래도, ‘진짜 용의 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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