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그래도 지난 10월엔, 그래도 평소에 비해 영화와 드라마들을 조금 더 많이 챙겨봤다. 아무래도 ‘빨간 날’ 즉 추석 연휴가 길어서였을까? 사실 주말이나 공휴일과 무관하게 출근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갖고 있어서 내 생활에 연휴의 영향이 별로 크진 않았을 걸로 생각했는데, 결국 빨간 날 숫자만큼은 휴무일을 지켜야 하는 게 맞아서(근로기준법에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다) 나도 모르게(?) 쉬는 동안 영화와 드라마들을 챙겨보게 된 것.
은근히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났다. 역시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선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었고. 공교롭게도 직전의 짤막 리뷰 또한 10월 중에 봤던 영화와 드라마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번엔 PART 2가 되었다. ^^
지난 얼마간 즐겼던 영화와 드라마들에 대한 짤막 소감 / 2025년 10월 PART 1
<세계의 주인> 윤가은 감독 / 서수빈, 장혜진 등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교외에선 봉사활동에도 열심인 여고생 ‘이주인’(서수빈). 어느 모로 보나 착하고 귀엽고 그냥 ‘평범한’ 아이처럼 보이는데 유독 한 가지 일에서만 급발진을 하는 모습이 있어 관객을 궁금하게 만든다. 주인이는 ‘왜’ 그럴까? 예전에 주인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러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주인이뿐 아니라 많은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전반적인 애티튜드는 물음표가 떠오르게 만든다. 동생 해인이는 왜 하고 많은 마술 가운데 무언가를 ‘사라지게’ 만드는 트릭에 집착하는 걸까? 주인의 엄마(장혜진)는 왜 알코올 중독자가 된 걸까? 주인의 아빠(김석훈)는 왜 주인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자연인’처럼 외진 동네에 숨어 사는 걸까? 주인과 친한 사이인 미도(고민시)는 왜 자신들의 동아리에 새로운 사람(남자)이 잠시 들어오는 일에 반감을 가진 걸까?
영화가 중반 정도를 지나면서, 관객들은 어렴풋하게나마 이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된다(그 과정에서 주인 역 서수빈 배우의 엄청난 퍼포먼스를 볼 수가 있다. <세계의 주인> 중 ‘세차장 씬’은 단언컨대 올해의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좋지 않은 어떤 일을 겪은 피해자에게 이른바 ‘2차 가해’를 하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큰 지탄을 받는 일이 있는데, 가끔은 그런 2차 가해를 의도한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저지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세계의 주인>이 보여주는 미덕, 혹은 미학적 성취는 관객을 점잖게 타이르거나 훈계하려 하지 않고 서서히 ‘느끼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고 하겠다.
<세계의 주인> 속 미스터리(?)의 정점은 주인이가 주변에서 종종 발견하는 쪽지에 있다. 주인이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쪽지(의 작성자)는, 주인이의 모습을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같은 반 급우들, 그리고 우리 관객인 것이다. 마지막에 마음을 열고 주인이의 모든 모습을 긍정하게 만드는 쪽지(의 작성자)가 결국 창작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세계의 주인>은 친환경 채소가 양푼에 가득하고, 시골에서 할머니가 직접 짜준 들기름과 고추장을 듬뿍 넣어 썩썩 비빈 보리밥을, 그것도 무균실에서 먹은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영화, 참 귀엽고 건강하다.
사족: 비슷한 내용을 다룬 <한공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이 언급이 큰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다), 두 작품은 가고자 하는 길이 무척 다르다. 두 작품의 연출자들이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건, 두 작품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들의 이미지만큼이나 다르다.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이 큰 눈망울의 소유자 한공주(천우희)와, 씩씩하게 뛰어다니고 태권도를 연마해 발차기도 잘 하는 이주인(서수빈)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라고 보면 맞지 않을까.
<굿 뉴스> 변성현 감독 / 설경구, 홍경, 류승범 등

‘실제 일어난 사실과, 믿으려는 의지, 그리고 약간의 창의력. 이 세 가지만 있으면 거짓도 사실로 만들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영화가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니? 게다가 그 실화란 것도, (영화의 소재가 되는 실화란 게 대부분 그렇지만)정말이지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힘든 수준이라니?
때는 1970년. 극중에도 언급이 나오지만 실제 기간으로 따지면 2025년인 지금보다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난 1945년부터 따지는 게 더 가까울 정도로 먼(?) 과거. 이 때는 남한과 북한의 체제 경쟁이 심해서 양 진영에선 서로를 극도로 터부시하던 때다.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에선 극좌파 단체 적군파가 맹활약(?)을 하던 때.
적군파 일당이 일본에서 여객기를 납치해서 평양으로 가려고 하는 하이재킹 사건이 벌어진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에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여객기를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하는데, 요즘의 일부 젊은 시청자(본작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았다)들은 ‘일본과 북한 사이에 벌어진/벌어질 수 있는 일인데 왜 우리가 여기에 끼지?’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는데, 전술했듯 1970년대에 일어난 일이고, 당시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인정하고 언급하는 것조차 불경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때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특히 당시만 해도 경제 사정이 북한보다 못했던 남한에선 일본 테러리스트들이 북한에 성공적으로(?) 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굴렀을 터.
<굿 뉴스>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우선 첫째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극화한 블랙코미디 장르란 점. 이동진 평론가도 본작에 꽤 높은 평가를 내리면서 아담 맥케이(<빅 쇼트>)를 언급했는데, 할리우드에선 꽤 자주 볼 수 있는 타입의 작품인데 유독 한국에선 참 보기 힘들었던 게 사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야기를 다루는 자체에 난이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란, 일종의 서스펜스이기도 하다. 즉 사건의 결과를 우리 모두(적어도 대부분)는 알고 있는데 그렇게 ‘뻔한’ 이야기 어디에서 어떻게 ‘드라마’를 만들어낼지 정하는 부분이 창작자의 역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 그렇다고 한국의 감독들이나 시나리오 작가들을 폄하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들은 아예 100% 새롭게 지어진 이야기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단 점을 되새기면 되겠다. 그리고 여기에, 아직 실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대놓고 언급하는(시간이 다소 흐른 일이라도) 일 자체가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지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사회적 경직성의 문제도 포함될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필모그래피에서 다소 부침이 없지 않았던 변성현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이 특이하기도 하다. 예전에 그는 <킹메이커>에서 일부 실화의 요소를 가져온 적은 있지만 블랙코미디와는 거리가 멀었고 바로 전의 작품인 <길복순>(그리고 연출 대신 시나리오만 쓴 <사마귀>까지)은 개인적으로 무척 별로였던 터라 <굿 뉴스>에서 보여진 모습은 다소 의외였던 것.
그렇게 한국에선 은근히 보기 드문 장르의 작품에서 변성현 감독은 꽤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호흡도 좋고, 서로 대립되는 사건을 병치시킨 편집도 능숙한 모양새. 무엇보다 당시 남한과 북한의 체제 경쟁, 그리고 한국과 일본 양국의 우스꽝스러운 관료주의를 통렬하게 풍자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른바 ‘제4의 벽’을 깨는 시도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쉽게 말해서 작품 속 캐릭터가 관객/시청자를 의식하여 어떤 행동을 하는 일.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이런 제4의 벽을 깬 대표적인 캐릭터는 바로 마블의 데드풀인데, 종종 카메라를 바라보며(그러니까 관객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웃기는 개그를 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 뭐, 거창하게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이런 장면이 나오는 대중문화 콘텐츠에선 대부분 코믹하게 그려진다.
이 또한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선 거의 볼 수 없었던 부분인데 <굿 뉴스>에서 나온다. (일단은)주인공처럼 보이는 ‘아무개’(이젠 변성현 감독의 페르소나가 된 설경구)와 서고명(홍경) 모두가 시청자에게 말을 건다. ‘당신들이 지금 보고 있는 건, 매우 재미있고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그리고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어떤 캐릭터의 어떤 액션은 아예 시공간이 통째로 현재를 벗어나기도 한다.
작품 전체로 보면 비중이 큰 부분은 아니지만 분명 감독이 이와 같은 시도를 한 이유는 있을 것이다. 직전에 말한 것처럼 지금껏 대부분의 작품에서 제4의 벽을 깨는 일은 다소 코믹하게 그려진 것이 사실인데, 본작에선 야심 차게 표방한 블랙 유머를 한껏 농후하게 만드는 성과를 냈다고 본다. 더 부조리하고, 더 우스꽝스러워졌다.
개인적으로 꼽는 다소의 불만 요소는 아무개 캐릭터의 활용 부분이다. 글쎄, 감독으로선 페르소나와 다를 바 없는 설경구란 배우를 가장 효과적으로 쓰고 싶었을 텐데(그리고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설경구란 배우가 가진 매력이 분명히 있긴 있으며, 그런 설경구란 배우를 가장 잘 ‘쓰는’ 연출자가 바로 변성현 감독이란 것도 사실이다), 내가 느끼기엔 디렉팅이 다소 과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 외에 아직은 다소 낯설지만 홍경 배우의 퍼포먼스는 준수했고, 오랜만에 본 류승범과 박영규 배우의 모습도 반가웠다. 아! 그리고 일본 관료로 나온 아마다 타카유키도 반가웠고, 역시 오랜만에 보니 나이도 좀 든 것 같고 살도 좀 찐 것 같고.
영화에 대한 토론이 활발한 많은 커뮤니티에서 <굿 뉴스>를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라고 상찬하는 글도 제법 많이 보는데 개인적으론 뭐 그 정도까진…? 다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영화 중에 최고라는 평에 대해선 그럭저럭 수긍하는 편.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 / 레베카 퍼거슨, 이드리스 엘바 등

미국이 핵미사일을 얻어맞는다! 이 단 한 줄의 이야기만 들으면, 뭔가 초대형 스펙터클이 펼쳐질 것만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세계의 주인>을 이야기할 때에도 그랬지만, 요즘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주면 촌스럽다는 소리 듣는다니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연출하는 데에는 할리우드에서 최고 수준이라 할 만한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 바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마땅히 챙겨봐야 할 것.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이 전화통을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역시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여기에서 저기까지 바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만 나오는데도 긴장감이 진짜… 어후.
무엇보다 실제 미국 본토에 핵미사일이 떨어지게 되었을 때 벌어질 일이란 점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게 한다. 그 활짝 열려버린 엔딩 때문에 투덜대는 시청자도 있겠지만, 애초부터 이 작품은 핵전쟁 그 자체를 보여줄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탁류> 추창민 감독 / 천성일 극본 / 로운, 신예은, 박지환 등

<광해>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과 <추노>의 극본을 쓴 천성일 작가가 만났다! 그것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이거 안 볼 수가 없지.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나 재미있었다. 사극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재미는 왕권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암투 같은 것보단 당시 민초의 삶을 생생하게 조명하는 데에서 맛볼 수 있다고 평소 생각하는 터라 그런 나에게 유독 특별한 작품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한강은 무척 중요한 곳이었다. 특히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물류가 집결되는 각 지역의 나루는 ‘왈패’라 불리는 조직이 대단한 위세를 떨면서 장악했는데, 이런 배경 스토리에 아픈 과거를 가진 주인공 시율(로운)과 어렸을 적 친구이자 형제나 다름없는 정천(박서함), 조선 최고의 장사꾼을 꿈꾸는 최은(신예은) 등이 어우러지게 된다.
실제 조선시대에 왈패란 조직이 있었고 활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9부작 드라마를 꾸려나가기에는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건 마치 도망친 노비만 전문적으로 잡으러 다니는 추노꾼이 실제 있었는지의 여부나, 광해군이 하루아침에 표변하고 그랬던 게 정말 다른 사람이 대역을 해서 그런 것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어디까지나 창작된 이야기인데, 뭐 어때서.
아무튼 모처럼 꽤 볼만한 사극 드라마였다. 일단 초반 1~2부 정도까지 보면서 엄청난 스케일의 이야기가 펼쳐지겠구나 생각했고, 중반 5~6부 정도 지나면서는 이 이야기를 9부 안에 다 어떻게 담아내려고 이렇게 늘어지지?(그래도 지루하진 않았다. ㅋㅋㅋ) 하는 생각도 했는데, 마지막 9부까지 보고 나니 아뿔싸, 왜 중간에 끝나고 마는 거니. ㅠㅠ
주인공 시율 역 로운은 본작을 마치고 입대했으니, 만약 새 시즌이 나온다고 해도 로운이 그대로 출연해야 한다면 적어도 3년은 기다려야 나오게 생겼으니 그 참 답답한 심정.
일단 본 기사를 끝으로, 당분간은 개인 일정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 넘게 업데이트를 하지 못하게 되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