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저항은 계속되어야 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 훌륭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될 때엔 거기에 나름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 기준이란 게 사람마다 다른 게 마땅한데, 개인적으론 ‘우리가/내가 두 발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조명한’ 경우에 다소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 말하자면 일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을 때 좋은 영화라고 평가하게 된다는 것(그래, 나 늙었다! 나 아재다! 어쩔래? ㅋㅋㅋ).

물론 낡고 딱딱한 프로파간다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도 유려하고, 세련되게. 종종 웃기게. 그래서 블랙코미디 장르의 영화를 유독 좋아하는 건지도. 아무튼 그런 나의 눈으로 보건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단연 올해 최고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폭파 전문가이자 좌파 혁명가였던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예전엔 투철한 혁명 정신으로 무장하고 치열한 삶을 살았으나(적어도 그랬던 것으로 보이나), 부인이 곁을 떠난 후 지금은 그저 늙고 쭈글쭈글해진 채 약과 술에 절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중년이 되었다. 그런 그의 곁엔 애지중지하는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가 있는데, 모종의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자이면서 고위급 경찰인 록조(숀 펜)에게 납치되자 딸을 찾아 나서게 된다는 것이 줄거리.

일단 본작은 두 캐릭터, 밥과 록조가 대립을 하면서 드라마를 만들어나가는 식으로 진행이 되는데 각각의 캐릭터가 대표하는 커다란 두 집단이 존재한다. 일단 밥이 소속된(현재는 사실상 은퇴 상태지만) 좌파 무장세력 ‘프렌치 75’. 지금으로선 조금 의아하게 들릴 수 있지만 미국에도 혁명을 통해 체제를 무너뜨려야 하며, 그 과정에서 다소간의 무력은 필수불가결하다고 부르짖는 세력이 존재했다. 덧붙이면 미국에서 활동했던 단체들은 사회적 특성상 반체제와 함께 흑인 민권운동, 성해방, 무정부주의 같이 꽤 다양한 분야에서의 변화 혹은 혁명을 내세웠던 것이 특징. 프렌치 75는 그런 단체들이 모델이 되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록조가 가입하려고 애쓰는 단체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 있다. 매우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데다가 필시 멤버들의 가입 여부도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모임은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유대인까지도 배척한다)를 표방하고 있다. 동시에 조직의 번영(?)을 위해선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멤버들 중엔 뒷배를 봐주는 고위급 공직자나 적어도 막후의 실력자들이 다수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서로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단체는, 묘한 지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과거엔 ‘전쟁영웅’ 소리를 들어 마땅했으나 현재는 술과 약물에 찌들어 사는 밥의 모습을 봐도, 아니, 과거에 한참 날리던 시절에도 ‘그렇게 고결하기 짝이 없는 혁명 정신을 수행하기 위해’ 하는 일이라곤 은행강도질이라니, 어느 모로 보나 프렌치 75는 그냥 나사가 여러 개 빠진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16년이 넘도록 접선 방법(암구호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나름 조직 운영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본작에는 참 웃기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암구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밥이 “이 X같은 리버럴 새끼 봐라, 사람이 말을 하는데 전화를 끊어?”라는 대사를 내뱉을 땐 정말이지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리버럴은 여기서나 저기서나 까이는 존재. ㅋㅋㅋ

저항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란 단체도 마찬가지. 비밀스럽기 짝이 없는 회합의 모습도 그렇고, 거의 10여 년 전의 경찰 내부 문건도 입수할 정도의 권력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는 ‘사람 잡는’ 공작을 꾸미고 있는 꼴을 보니 여기도 볼장 다 봤다 싶다. “깨끗하게 청소해. 바닥에 떨어진 것도 주워먹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그렇다고 해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그냥 ‘여기나 저기나 다 똑 같은 머저리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단체들, 그리고 그들이 대변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을 관객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각인하기 위한 최선의 연출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장르적 쾌감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 특히 후반부 사막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펼쳐지는 자동차 추격전 장면은 단연 하이라이트. 짧은 호흡으로 많은 컷을 이어 붙인 모습이 아니라, 롱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가 부딪히도록 하며 몽타주 효과를 부각시키면서 묘하게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도로의 모습 자체가 마치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꽤 인상적이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스티브 맥퀸 등이 출연했던 70~80년대 액션 영화를 참고했다”고 하던데,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프렌치 커넥션>이나 <게터웨어>, 그리고 <불리트> 같은 영화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가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은 것은 멋진 캐스팅과, 멋진 퍼포먼스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밥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전화통 붙잡고 울상을 짓는(ㅋㅋㅋ) 모습에서 이젠 정말이지 어떤 경지에 올랐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근데 왜 묘하게 자꾸 잭 블랙이 겹쳐 보이지. ㅋㅋㅋ

연기에 있어서 어떤 경지라면, 단연 록조 역의 숀 펜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솔직히 내년 오스카에서 남우조연상 안 주면 이상한 일일 터. 알고 보면 되게 찌질한 캐릭터인데, 만약 저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걸어갈 때도 진짜 저렇게 걸음걸이를 할 것 같은’ 느낌이어서 단연 압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숀 펜의 최고 연기는 <밀크>에서 실존 인물인 하비 밀크 역의 연기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

윌라가 가라테를 배우는 도장의 세르지오 사범 역을 맡은 베니치오 델 토로는 또 어떻고?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정말 천연덕스럽게, 한없이 여유롭게 ‘그저 자신의 일을 순서대로’ 해나간다. 따지고 보면 밥과 프렌치 75가 예전에 그렇게 떠들썩하게 부르짖었던 ‘혁명 정신’을 오늘날에도 묵묵히 수행하는 인물이기도. 그래서 많고 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가라테 사범이었나?

앞서 감독이 그저 모두까기 인형이 되는 것을 피했다고 했는데, 사실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엔딩에 그대로 드러났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스마트폰이라는 신문물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선대의 혁명가 밥. 그리고 대를 이어 혁명 정신을 수행하기 위해 나서는 윌라. 하긴, 지금 미국에서 트럼프가 어떤 난장질을 벌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꼬락서니가 펼쳐지고 있는지 상기해보면, ‘왜 혁명과 저항의 정신이 지금도 필요한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비장한 한편으로 유쾌하고, 신랄한 한편으로 유려하며, 묵직한 한편으로 재기발랄한 작품을 빚어낸 감독과 제작진, 배우들에게 커다란 찬사를 보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매우 큰 성취를 일궈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