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들 사이에선 “캐릭터만 확실하게 잡아놓으면 이야기는 저절로 풀린다. 다음에 할 행동은 물론, 심지어 대사까지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렇게, 캐릭터를 완벽하게 잡기 위해 다양한 설정이 따라붙는다. 예전에 읽었던 시나리오 작법 서적에는 캐릭터 구축을 위한 여러 조건이 리스트로 구성되어 있기도 했는데, 기억을 더듬어 그 리스트 중 일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당신이 창조한 캐릭터는)어떤 스포츠 클럽을 응원하는가? 그렇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투표일에 진보적인 후보에게 투표하는가, 아니면 보수적인 후보에게 투표하는가?
- 아니면 아예 투표 따위는 하지 않는가?
- 만약 길에서 현금이 든 지갑을 주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뇌물을 요구하는 공무원과 만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밖에도 엄청 다양한 리스트가 있었는데 아무튼 이런 식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캐릭터에게 위의 질문을 대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바른생활 사나이’로 유명한 (1대)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의 예를 들어보자. 그가 뉴욕 양키스의 팬인 건 알겠는데, 그 이유는 뭘까? 아마도 출신이 그쪽이니 단순히 고향 연고 팀을 응원하는 것일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는, 음, 아무래도 보수 쪽에 가까울 것이고, 투표도 당연히 그렇게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정말 드라마틱했던 부분이 바로 그 ‘캐릭터’와 깊게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슈퍼히어로들은 미국 정부의 관리 하에 있어야 한다는 ‘소코비아 협정’을 두고, 그 캐릭터의 성격만 놓고 보자면 마땅히 찬성을 했을 것만 같은 캡틴 아메리카는 오히려 반대 입장이었고, 마찬가지로 성격만 놓고 봤을 땐 마땅히 반대를 했을 것만 같은 토니 스타크가 오히려 찬성을 하지 않았던가?! 물론 원작 코믹스가 따로 있긴 했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구성하는 일에 있어서 작가의 역량은 이렇게 발휘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 캐릭터만큼 구축에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 바로 주인공과 맞서는 악당 캐릭터의 구축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영화 사상 손에 꼽힐 만한 매력적인 악당/안타고니스트로 종종 회자되는 캐릭터가 바로 <더 록>의 험멜 장군(에드 해리스). 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가 알카트라즈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인질로 잡고 정부에 요구하는 바가 무엇이었나? ‘더러운’ 작전 중 순직한 자신의 부하들을 인정하라는 것 아니었나? 악역으로서의 모든 행동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서두가 길었다.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 때 캐릭터를 구축하는 일과 그에 맞는 서사를 부여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니 부디 양해를.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드라마 <더 펭귄>이 그런 부분에 있어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더 펭귄>은 지난 2022년 개봉한 <더 배트맨>에 출연했던 빌런인 오스왈드 코브, 일명 ‘펭귄’이 주인공인 스핀오프 드라마. 영화로부터 2년이 지난 작년에 HBO 맥스를 통해서 1시즌, 에피소드 8편이 공개되었다. 공개 직후 많은 매체와 평론가, 그리고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던 그 드라마를, 이번에 뒤늦게 보게 되었다(솔직히 쿠팡플레이에 HBO 드라마들이 주루룩 올라오면서 보게 된 것).
이전에 별로 궁금할 일이 없던 빌런을, 굳이 주인공으로 내세워 드라마를 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악당이긴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과 맞서는 악당이기도 하고 이전에도 수 차례 영화와 TV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미디어믹스에 출연한 바 있으니 제작사는 인지도 확보 차원에서 괜찮은 선택으로 여겼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긴 한데, 그런 정량적인 부분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중요한 정성적인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펭귄 캐릭터 역을 맡은 콜린 패럴의 탁월한 연기력이다!
고백하자면 <더 배트맨>을 두 번이나 봤는데 ‘오즈’ 오스왈드 코브/펭귄의 얼굴에서 콜린 패럴의 잘 생긴 얼굴이 전혀 안 보이는 게 무척 인상적이기도 했다. 그만큼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되겠지. 아무튼 본작 드라마에선 오즈가 어떻게 어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 그리고 거기에서 어떻게 ‘굴러먹으면서’ 버텨왔는지, 어떻게 결국 희대의 범죄자가 되었는지 전부 잘 보여주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경구가, 펭귄만큼 잘 어울리는 범죄자(?)도 또 없을 것이다. 드라마 1편 시작부터 그가 하는 짓이라곤 좀도둑질. 그러다 우발적으로 살인을 하게 되는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그저 ‘말빨’로 순간을 모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면서 시청자들은 이 캐릭터에게 빠져들게 되고 시즌 막바지에 가선 그 탁월한 모습에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사실 펭귄은 어렸을 적 형제를 잃은 아픔이 있다(사실 오즈 자신의 실수/혹은 고의로 인해 형제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긴 하다). 그 충격(아이를 둘이나 한꺼번에 잃은 충격과, 그 사건에 자신의 또 다른 아들인 오즈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충격)으로 인해 오즈의 모친은 ‘나사가 하나 빠졌고’, 이후 시간이 지나 치매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오즈는 바로 그런 어머니가 스스로의 가장 큰 약점이 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더 펭귄>에서 주인공 오즈 역 콜린 패럴의 연기만큼 또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배우가 바로 소피아 팔코네/지간테 역의 크리스틴 밀리오티. 사실 본작에선 아예 한 에피소드 전체를 털어서 소피아가 ‘어떻게’ 그런 캐릭터가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팔코네 가문의 맏이인 그녀는 애초 범죄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고담을 대표하는(?) 마피아 패밀리를 이끌게 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연기. 한 가지 덧붙이면 <더 펭귄>은 공개 이후 ‘DC판 <소프라노스>’란 별칭을 얻었는데, 크리스틴 밀리오티는 공교롭게도 <소프라노스>에 출연한 적이 있다.
앞서 언급한 부분과도 연결되는 점인데, 본작에 대한 호평이 많고 무엇보다도 무척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 오즈와 소피아를 비롯하여 출연하는 대부분 캐릭터들의 행동에 당위성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오즈가 ‘지하 세계’에서 일하게 되는 점이나, 팔코네 가문과 마로니 가문의 대립 사이에서 오즈가 취하게 되는 이득이나, 본작에서 처음 출연하는 펭귄의 ‘사이드킥’ 빅터의 동네에서 벌어진 일들(참고로 <더 펭귄>은 영화 <더 배트맨> 직후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즉, 고담시가 완전 수몰된 이후이다) 등등에서 각 캐릭터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오즈/펭귄이란 캐릭터의 잊힌 과거, 개인사가 나오긴 하지만 ‘그런 일 때문에 악당이 된 것’이란 어설픈 훈계 따위는 없다. 오히려 ‘그럼에도 그는 악당이 된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매우 비열하고 자격지심도 심한 오즈가 자신이나 모친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을 때조차 잔머리를 굴려서 그저 그 순간만 어떻게든 넘어가려는 모습까지 보고 있으면 진짜 뻔뻔하기 짝이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더 펭귄>의 엔딩에선 고담의 밤하늘을 비추는 ‘배트 시그널’을 볼 수 있다. 만약 새 시즌이 나오게 된다면 배트맨도 볼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너무 먼 얘기일 것이다. 일단 본작의 세계관에 준비된 다음 작품이 다름아닌 <더 배트맨>의 속편. 전편을 연출했고 <더 펭귄>에선 제작을 맡은 맷 리브스 감독은 공동 작가 맷슨 톰린과 함께 <더 배트맨: PART 2>의 시나리오를 막 탈고했다고. 촬영은 내년에 시작될 예정이고 전편의 배우들인 로버트 패틴슨, 조이 크래비츠, 앤디 서키스 등과 함께 콜린 패럴도 출연한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