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전체를 그저 두세 가지 색으로 구분한 게 전부인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나, 그저 수프 깡통을 그렸을 뿐인 앤디 워홀의 작품이나, 물감을 흩뿌리며 작업한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을 두고, 다소 의아해할지언정 ‘이게 무슨 미술작품이냐’고 할 사람은 솔직히 많지 않다. 그래도 이들은 그림을 직접 그리는 수고(?)라도 했지, 철물점에서 변기 하나 사다가 시치미 뚝 떼고 미술관에 전시하면서 <샘(Fountain)>이라는 이름을 붙인 마르셀 뒤샹에 대해선? 역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평론가들이 인정하는 작품이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입 다물자’는 정도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스노비즘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적어도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대상에 대해선 그래도 남들 앞에서 젠체할 수준은 못 되어도 조금이나마 공부 좀 하고 배경 지식을 쌓는 일이 그만큼 흥미롭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예술작품에 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물론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의 한 장르이며 훌륭한 작품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상업적 흥행을 염두에 둔 영화에서까지 사전 지식이나 배경 스토리나 심지어 이스터에그를 모두 섭렵한 이후에야 비로소 100%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썩 좋은 작품이라고 하긴 힘들다는 것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이하 <데드풀 3>)이 딱 그런 식이다. 예고편 공개 때부터 스스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지금 상황이 무척 좋지 않은)마블의 예수”임을 자처한 데드풀인데, 시작 부분에 (시간상 전에 개봉한 작품에서)사망한 것으로 처리된 로건(울버린)을 ‘파묘’하는가 하면(…), 세계관을 일부나마 공유하는 다른 작품에서 출연했던 수많은 캐릭터들을 불러모았다. 말하자면, 작중 직접 내뱉은 대사처럼 스스로 “어벤져스를 어셈블”한 셈.
개인적으로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예고편도 처음 공개된 버전 딱 하나만 봤고 평소 자주 가는 영화 관련 게시판도 발길을 딱 끊은 상태에서 관람했을 때, 정말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놀라운 캐릭터들의 출연이 반가웠다! 이전에 다른 작품에서 봤던 주인공 슈퍼히어로들은 물론, 소문으로만 무성했던(아직 단독 주연작은 없는) 캐릭터와 함께, 심지어 다른 작품의 빌런들조차 다시 보니 새삼스러워서 참 인상적이었을 정도. 다만 이번 <데드풀 3>에 나온 캐릭터/배우들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새 작품이 ‘또’ 만들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냥 이번이 마지막 팬서비스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앞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인용했으니, <데드풀 3>에 데드풀과 함께 주연으로 나오는 울버린과 함께, (지금은 디즈니에 흡수 합병된)과거 20세기폭스에서 만들어진 <엑스맨> 프랜차이즈에 나왔던 모든 캐릭터들에 대한 지식을 전부 다 머리에 넣고 이번 영화를 보면, 그렇게 되면 제작진(숀 레비 감독은 물론, 시나리오 작업에도 일부 참여했고 제작자이기도 한 라이언 레이놀즈를 포함한)이 의도한 모든 재미 요소를 ‘다 뽑아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데드풀은 말 많은 떠버리로 유명하다(그래서 마스크로 입까지 가렸다). 영화 속 출연자와 관객 사이에 놓인 이른바 ‘제4의 벽’을 깬 데드풀은, 각 캐릭터와 함께 해당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 사이에 실제 있었던 사생활 이슈까지도 농담거리로 삼을 정도다.
그와 같은 캐릭터의 특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바로 데드풀이 전작인 2편의 쿠키영상에서 주연배우 라이언 레이놀즈(<그린 랜턴>의 시나리오를 읽고 있던)를 인정사정 없이 총으로 쏴버리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라이언 레이놀즈 입장에서 <그린 랜턴>은 그야말로 회복하기 힘든(스스로 죽는 자학개그로 승화된) 흑역사였던 사실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이런 장면은 왜 들어간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본작에서 ‘특정 캐릭터’가 “XXXX는(본인은) 언제나 나 하나였어”라고 하자, 데드풀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고’ 미소를 짓는(?) 장면에서 온전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관객은, 장담컨대 생각보다 적을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데드풀 3>의 재미를 ‘골수까지 뽑아먹으려면’ 다른 슈퍼히어로/빌런 캐릭터들에 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여기에 덧붙여 대사 번역 및 자막 문제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 데드풀이란 캐릭터는 원래부터 수다스럽기 짝이 없어서 비슷한 러닝타임의 다른 영화와 비교해도 대사량과 자막 분량까지도 월등히 많은 수준. 그런데다 관람 등급도 R등급(국내에선 19금)인 만큼 노골적인 수위의 대사도 많은데 이 정보를 모두 처리하려면 매우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 데다 아예 이야기의 가장 기본적인 테마조차 엄연히 다른 작품인 <로키> 드라마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으니, 진입장벽이 높기는 하다. 여러 모로 따져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는 것.
따지고 보면 <데드풀> 시리즈 자체가 원래 그렇긴 했다. 그러나 전작들인 1편 및 2편의 상황과 이번 3편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1편과 2편은 워낙 캐릭터 자체가 생소하고 목불인견(…) 수준의 사지절단 비주얼이 많아서 호불호는 갈렸으나 적어도 유쾌하고 시원하며 재기발랄한 인상은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3편은 구구절절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관객에 따라서는)가물가물한 캐릭터들이 자꾸만 나오는데, 별로 웃기지도 않은(엄밀히 말하자면 ‘웃어야 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유머를 자꾸 구사해대니 썰렁해지는 것. 본작을 평일 오후, 관객이 적은 시간에 관람하긴 했으나 객석에서 빵 터지는 웃음소리가 거의 한두 번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있긴 할 것이다.
<데드풀 3>에 대해 불만을 많이 늘어놓은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재미없진 않았다. 반가웠던 캐릭터들과 함께 펼치는 액션은 제법 무게가 있었고, 나름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선 킥킥대며 웃을 수 있는 유머 코드도 존재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했던 데드풀은 이게 아니었다. 이번에 보기 전에 일부러 1편과 2편을 복습했는데, 전작들에서 느꼈던 그 통통 튀는 경쾌함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 제일 큰 불만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작성 중인 시간 기준으로 바로 오늘 새벽, 무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MCU에 다시 복귀한다는 빅 뉴스가 전해졌다. 게다가 이번에 그가 맡을 배역은 빌런인 닥터 둠. <엔드게임> 이후 사실상 계속된 헛발질로 디즈니가 초강수를 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MCU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