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감독’이 뚝심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헌트>

영화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포스터

영화를 볼 때, 스크린 너머로부터 전해지는 에너지가 워낙 강렬해서 ‘힘’이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차피 계량화할 수는 없는 부분이니 배우의 연기, 편집, 미장센, 스토리 같이 영화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던 영화들은 <시티 오브 갓>과 <다크나이트>와 <히트> 등등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편이 더해진다. 이정재 ‘감독’이 연출한 <헌트>는, 일단 이야기 자체의 밀도가 굉장히 높은 편. 러닝타임 125분 내내 다양한 사건이 펼쳐지는데 그 와중에 관객은 ‘조직에 잠입해서 암약하는 두더지가 도대체 누구인지’ 추리까지 해야 하는 부담감(?)도 얻게 된다. 또한 초반부터 강도 높은 액션 장면도 이어진다. 특히 배경이 배경인 만큼 군용 소총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총격전은 이전까지의 한국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장면은 아닌 만큼 관객이 받아들이기에도 만만치는 않을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헌트>의 이야기에 무게감을 확실하게 더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지내온 시대일 것이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83년. 내부적으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서 본격적으로 폭정을 휘두르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고 외부적으론 북한과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이던 때. 당시를 직접 겪은 세대에겐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콘텐츠 창작자의 시각으로 보면 ‘시대가 만들어낸’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창작의 영역에서 조명하기에 정말 좋은 배경이기도 하다.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말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이라면 <헌트>에 묘사된 (북한과 얽힌)여러 사건들(실제 일어났던 사건들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사건들이지만, 영화 자체는 당연히 픽션이다)을 대하는 감상이 사뭇 남다를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완벽한 투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정재 / 정우성

장르적 관점에서 보면, <헌트>는 조직에 침투한 스파이를 색출하는 첩보물의 고전적인 외피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객의 추리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두더지’를 찾아내는 것만큼 중요한 또 다른 미션이 주어지고, 자연스럽게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 두 명의 메인 캐릭터가 서로 맞서는 구도가 형성되면서 긴장감은 더해진다.

한 쪽에서만 반대쪽이 보이는 매직 미러를 통해 두 명이 서로 째려보는 장면은 솔직히 너무 뻔한 장면이긴 하지만 ㅋㅋㅋ 또 그만큼 여러 영화에서 반복되었고, 그만큼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좋은 장면이다. 그러다가 결국 둘은 육박전까지 벌이는데, 서로 합을 잘 맞추고서 세련된 격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힘과 힘이 부딪혀서 뒤엉킨 상태에서 계단을 몇 번이나 구르게 되는 모습으로 연출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본다.

<헌트>는 의외의 얼굴을 찾는 재미도 선사한다. 주연이면서 연출까지 맡은 이정재 배우와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인지 아니면 충무로 바닥에서 발이 넓은 걸로 유명한 제작사(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와의 인연 때문인지 그냥 혼자서 주연을 맡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황정민, 이성민, 박성웅, 김남길, 조우진 등의 배우들이 대거 카메오 혹은 우정출연을 하고 있다.

이전까지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었던 본격적인 총기 액션이 펼쳐진다

지금까지 <헌트>를 다소 우호적으로 이야기한 느낌인데, 당연하지만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게 봤기 때문이다. 2022년 여름 시즌 덩치가 큰 영화들, 특히 한국영화들은 이른바 ‘빅 4’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봉을 했는데 내가 본 중에선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영화가 바로 <헌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관객에겐 <헌트>가 가진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게 한다. 이야기 자체가 무겁고, 진지하고, 선 굵은 터치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영화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피로를 느끼게 할 수가 있다. 또한 1980년대 전후 한국에서 벌어진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해 지식이 없을 경우 온전한 재미를 느끼기에는 부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또한 하게 된다. 솔직히 ‘관객에게 친절한’ 영화라곤 빈말로도 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영화적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후회를 할 관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점, 장담한다. 관객이 제작사나 감독의 사정(?)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처음으로 연출을 한 작품이 <헌트>라면, 이정재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이야기. 이미 많이 알려진 것처럼 <헌트>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물밑에서(?) 진행된 기획이라고 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시나리오 초고가 있었는데, 여기에 매력을 느낀 이정재 배우가 직접 시나리오 판권을 사고 다른 연출자, 시나리오 작가에게 의뢰를 하면서 몇 번이고 엎어졌던 기획이 최종적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맡게 된 것이라고.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는 왜 그랬을까 궁금했는데, 기획이 엎어지는 과정에서 여러 제작자, 감독, 시나리오 작가, 그리고 배우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컸다는 이야기까지 듣고는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됐다. 솔직히 <헌트>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들으면 ‘도대체 그걸 영화 한 편으로 어떻게 만들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것이 사실. 전체 규모가 너무나도 크고, 속된말로 ‘와꾸를 잡기가 힘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서, 참 쉽지 않은 기획을 뚝심으로 밀어붙여 기어코 성공시킨 신인 감독과 제작자(공동 제작자 중엔 이정재도 포함되어 있다)는 새삼 대단한 사람들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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