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연 없는 인생 없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MCU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그러니까, 이른바 ‘슈퍼히어로’들)에게도 저마다 기가 막힌 곡절 한 자락씩은 부여되지 않았던가. 하필이면 친구의 손에 부모님을 잃는가 하면,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도 눈앞에서 잃고,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백성들조차 한꺼번에 잃는 상황까지 갔으니. 어쩌면 바로 그렇게 아픈 구석들이 이 거대한 이야기에 갈등의 요소로 작용하여 재미를 더해주고 완결성을 부여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토르도 MCU 세계관 내에선 누구 못지 않게 불행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콩가루 집안(…)의 내력이야 새삼 들추기도 뭐하고, 무엇보다 왕국의 백성들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목도할 수밖에 없었으니.
어쩌면 그런 슬픔을 톡톡 튀는 유쾌함과 깨방정으로 극복(?)해냈기에, <토르: 라그나로크>에서의 토르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응원을 보낸 건지도 모르겠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이런 상황으로부터 자신감을 얻어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다 했다’. 바로 이번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평론가, 기자, 그리고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끌어내는 데에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안 웃긴다’. 대놓고 코미디 장르를 표방한 영화도 아닐진대 안 웃긴다고 뭐라 할 만한 건 아니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텐데 문제는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웃기기를 시도’하는데 그게 먹히질 않는다는 것! 안 그래도 ‘멍청한 근육 바보’ 캐릭터 설정이 점점 굳어지는 듯한 느낌의 토르인데, 종잡기가 힘든 이 작품의 유머 코드는 전편에 비하면 매우 아쉬운 수준이다.

그리고 뭔가 중요한 서사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미 예고편에서도 진작 공개된 것처럼 토르의 연인인 제인이 ‘마이티 토르’로서, 무려 묠니르를 들고 등장하는데,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설정이 부족하다(전혀 없지는 않지만, 부족한 느낌이다). 또한 그렇게 엄청난 힘을 손에 넣은 ‘마이티 토르’와 ‘오리지널 토르’의 화끈한 협업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용 영화’라는 ‘아이덴티티’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이전까지의 MCU 영화에선 볼 수가 없었던, 참 생경한 장면이 나오는데(자세히 이야기하기엔 스포일러가 되므로), 미국 잼민이들은 그와 같은 모습에 열광할지 몰라도 한국에선, 전혀. 덧붙이면, ‘마블민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MCU 영화들의 흥행은 꽤 성공하고 있는 편인데 참 희한하게도 우리나라에서 MCU에 열광적 지지를 보내는 평균적인 관객 연령대는 생각보다 낮지 않다(심지어 요즘은 마블 캐릭터가 새겨진 폰케이스를 쓰고 있으면 ‘젊어 보이고 싶어하는 아재’란 소리까지 듣는다고 한다. ㅠㅠ).
한편, 전직 배트맨(?) 크리스찬 베일의 고르 역 연기는 정말 탁월했다. 그가 왜 신만 골라서 죽이고 다니는 ‘갓 부처(God Butcher)’가 되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토르/마이티 토르의 반대편에 선 빌런이 되었는지 영화 맨 처음 시작과 함께 보여준 감독의 선택은 훌륭했다고 본다.

전반적으로 어수선하고, 썰렁하며, 가끔 진지한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장점은 1980년대부터 90년대 정도까지를 풍미한 메탈 곡들,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건즈 앤 로지스 곡들이 적재적소에서 흥겨움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전작인 <토르: 라그나로크>에선 레드 제플린의 ‘Immigrant Song’이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하고 이끌어나갔다면, 이번 편에선 건즈 앤 로지스의 ‘Welcome to the Jungle’, ‘Sweet child o’ Mine’, 그리고 심지어 ‘November Rain’ 같은 곡들이 올드 팬들의 귀를 간질이면서(?) 이야기가 힘을 받는다. 그러고 보면 공식 포스터에 박힌 제목 텍스트의 스타일부터가 바로 그 시절 메탈 밴드 앨범 재킷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런 모습이다.
그렇다는 건 중년 이상의 관객들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한편으로, 그보다 젊은 관객들은 이른바 ‘뉴트로’ 트텐드를 어필한다는 생각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남은 건 2시간짜리 건즈 앤 로지스의 뮤직비디오였으니…
흥행적으로도 그렇고 팬들에 대한 존중과 보답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큰 성공을 거둔 MCU의 이른바 ‘인피니티 사가’(<어벤져스: 엔드게임>까지의 작품들) 이후 MCU 작품들이 부쩍 힘이 딸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여러 가지 요인들이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디즈니 플러스 채널을 통해서만 공개되는 드라마들과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진입장벽이 높아졌다는 지적도 있고, 전작들과 달리 개별 연출자들의 취향이 지나치게 큰 폭으로 반영되면서 전반적인 만듦새가 들쭉날쭉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그 지적들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전 세계의 대중문화 콘텐츠에 깊게 관여된 인물로, ‘가장 큰 규모로 성공한’ 성덕의 타이틀을 가진 케빈 파이기 사장이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