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조금 덜한 듯한데, 예전엔 ‘우화(寓話, Fable)’라는 타이틀을 붙인 책이 참 많이 나왔고 실제 팔리기도 참 많이 팔렸다. 그 단어의 의미는, 현실에선 일어나기 힘든, ‘판타지스러운’ 내용 안에 교훈이나 풍자를 가득 담은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면 거의 틀리지 않을 듯하다. 대표적으로 <이솝 우화>가 있고, 그 밖에 ‘어른을 위한 우화’니 ‘다시 읽어보는 우화’ 같은 식으로 조명된 책들이 많았던 기억이 있다.
글로 이루어진 이야기나 소설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도 우화에 꽤 잘 어울리는 물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영화가 그만큼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기에 유리한 매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핏 스쳐 지나가는 이름들이 많다. 코엔 형제, 기예르모 델 토로, 알폰소 쿠아론, 봉준호, 요르고스 란티모스 같은 감독들 이야기다.
그리고 오늘 리뷰를 할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이 작품은 감독이 직접 쓴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연출한 마틴 맥도나 감독의 이름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애초 고향인 영국에선 희곡 작가이자 연극 연출가였고, 영화로 진출하여 역시 직접 대부분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을 했다. 국내에선 <킬러들의 도시>라는 괴상한(?) 제목으로 번역된 <In Bruges>로 엄청난 호평을 받은 후, <쓰리 빌보드>로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를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바로 그 감독이다.

때는 1923년. 아일랜드에선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직후 급진파와 온건파가 서로 갈라져 내전이 벌어지던 시절. 해안가의 작은 섬마을 이니셰린은 그저 마을 사람들이 펍에서 맥주 마시면서 수다 떨다가 노래도 부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의 거의 전부인 동네. 그런 뻔한 동네에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절친 사이가 하루 아침에 박살 나는 광경이 벌어진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작품을 보기 전에 예고편을 먼저 봤는데 예고편을 통해서도 ‘도대체 무슨 이야긴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가, 결국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스포일러 하나 하자면, 두 절친 중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절교 선언을 한 이유는, 끝끝내 밝혀지진 않는다(사실, 이 작품에선 그게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
앞서 ‘우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함께 감독의 개성을 언급한 만큼, <이니셰린의 밴시>에서도 은유의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아무래도 세상의 많은 우화가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많이 취하는 방식일 터. 그러면서 본 작품은, ‘비슷한 선택을 한 실력 없는 창작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얄팍한 강박을 슬쩍 벗어난다. 시치미 뚝 떼고, 굳이 설명을 하려 들지 않으면서도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보자. 콜름(브랜던 글리슨)은 원래부터 그랬는지 알 길은 없으나 상당히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절친과 하루아침에 절교라니. 게다가 그가 내세운 이유 또한 어이가 없다. “(그 절친이)너무 지루하고 멍청해서” 그랬단다. 파우릭(콜린 패럴)은 착하고 순박한 시골 청년이지만, 솔직히 안 지루하고 안 멍청한 건 아니다. 콜름은 자신에게 한 번만 더 말을 걸면, (바이올린 연주자로선 생명이나 다름없는)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참고로 ‘이니셰린’은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동네 이름이고, <이니셰린의 밴시>라는 제목은 작중에서 콜름이 작곡한 바이올린 곡의 제목이다). 그런데 아뿔싸, 파우릭을 포함한 모든 동네 사람 중에 콜름의 그와 같은 선언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따지고 보면 ‘나사가 하나 빠진 동네 바보’ 도미닉(배리 키오건) 뿐이었으니.

<이니셰린의 밴시>에는 이런 중심 이야기 외에도 채 전부 주워섬기기도 힘든, 다양한 곁가지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이야기들은 가장 적합한 캐릭터와 가장 적합한 상황을 통해 체화되면서 관객에게 기묘한 흥미를 제공한다. 하다못해 초반엔 서정적이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아일랜드 시골 섬마을의 풍광조차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저 심심하고 건조하게만 느껴진다. 특히, 무겁게 내려앉아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은 구름. 이것이 북유럽 감성이로구나.
그리고 앞서 언급한, 작품 속에 다양한 층위로 존재하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모두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나 해결로 이어지지 않는 대신 오히려 그 자체가 전혀 다른 테마로 재구성된다는 측면에선 어쩌면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부조리극의 향취도 느껴진다. 정말 콜름이 절교 선언을 한 이유는 뭘까? 둘 사이는 나중에 어떻게 될까? 그런 건 밝혀지지도 않는다. 고도를 기다렸던 사내들이 나중에 고도를 만나긴 하나? 아니, 그 전에 고도란 게 도대체 뭐야? 역시, 그런 건 밝혀지지도 않는다.
이야기의 힘과 연출의 힘에 더해서, 훌륭한 배우들이 펼치는 명연기 또한 <이니셰린의 밴시>에서 유감없이 맛볼 수 있는 재미라고 하겠다. 지루하고 멍청한데다 찌질하기까지 한 콜린 패럴, 괴팍하고 종잡을 수 없는 브랜던 글리슨(이 둘은 <킬러들의 도시>에서도 같이 출연한 바 있을 정도로 마틴 맥도나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전엔 지구상 어느 동네에나 있었던 덜 떨어진 바보 배리 키오건(그의 연기는 진짜 끝내줬다! ㅋㅋㅋ), 지성을 갈망하지만 생활에 치여 성마르게 변한 케리 콘돈 같은 배우들은 모두 일생일대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특히 파우릭 역을 맡은 콜린 패럴은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좋아했던 배우라서 더 애착이 갔다. 그런데 주변에 좀 물어보니 의외로 좋아한 사람이 별로 많지는 않더란. 처음 얼굴을 알렸던 20여 년 전만 해도 ‘꽃미남 반항아’ 계열의 배우였다가 얼마 안 지나 다소 지저분한 스캔들에 연루되며 반짝 스타였던 기억만 사람들에게 남겨둔 채 잊히는가 싶더니, 언젠가부터 실력 있는 감독들의 부름을 받고 아트하우스 영화들에 출연하는 걸 보니까 이제 완전 연기파 배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다. <더 배트맨>의 스핀오프 <펭귄>에서도 멋진 모습 보여주길 기대한다.
요즘 무엇보다 영화 관람료가 많이 올라서 예전처럼 영화관 나들이를 쉽게 선택하기도 조금 주저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 일부 블록버스터급 작품들만 영화관에 걸리고 중소 규모의 영화들은 아예 개봉조차 힘든(물론 그렇다고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모두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럴 때 <이니셰린의 밴시> 같은 영화를 놓치는 건 정말이지 아까운 일이다. 상영 시간도 아쉽고. 그래도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으로 망설임 없이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