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빠단(王八蛋). 중국에선 매우 심한 욕설이라고 한다. 아주 예전 중국인들은 거북이나 자라는 암컷만 있고, 따라서 번식을 위해서 거북이나 자라는 뱀과 짝짓기를 하여 알을 낳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그렇게 태어난 알을 바로 ‘왕빠단’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에게 ‘왕빠단’이라고 욕을 하는 것은 그 어미가 아비 아닌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여 낳은 자식이란 뜻이 되니 욕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 집안까지도 싸잡아 격하시키는, 정말 흉하기 짝이 없는 욕설이라고 하겠다.
여기, 마을 사람 누구나 ‘왕빠단’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하나 있으니 그는 이름조차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그리고 그 이름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대륙을 휩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민초들이 그랬듯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그저 ‘阿Q’라고만 불리는 사람. 이렇다 할 거처도 없이 마을 밖 사당에서 지내면서 밥값, 술값이 떨어지면 그때그때 날품팔이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자주 술과 도박을 즐기다가 그보다 더 자주 동네 깡패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곤 하는 아Q는, 측은지심이란 걸 도통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인물.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가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면서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루쉰 선생이 말이다. ‘아큐정전’에 관한 자료를 찾다 보면 이 작품은 인민에 대한 계몽이란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즉, 청나라 말기 전반적인 사회상이 극도로 혼란했음에도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전형적인 소인배의 모습에 당시 인민들의 모습을 투영시켰다는 것.

여기에서 잠깐. 솔직히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면모를 보이는 게 어디 아큐 뿐이겠으며, 청나라 말기의 인민들뿐이겠는가? 아큐정전을 보고서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프랑스 작가 로망 롤랑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기간, 서구 열강은 청나라를 종이 호랑이로 보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당시 유럽에서 발간되었던 신문들의 만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원래 이런 거대담론일수록 미시적으로 접근해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만들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점에서 길바닥 인생을 살다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만 ‘왕빠단’ 아큐의 이야기야말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테마가 아니었을까? 물론 문학적인 재미 측면에서도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을 테고. 한 가지 예로, 당시 중국 사회 전체, 혹은 중국 인민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는 아큐는 자기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까막눈이어서 서명 대신 동그라미만 그리고 만다. 그것도 삐뚤빼뚤하게!
인터넷 커뮤니티의 수많은 게시판에선 아주 가끔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는가 하면 매우 자주 목불인견의 난장판 소동이 벌어진다. 요즘 말로 ‘병신들의 올림픽’이라는 ‘병림픽’이 열리는 것. ‘이겨도 병신, 져도 병신이면 이긴 병신이 되는 게 낫다’는 것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 바닥에서 필요한 덕목(?) 중 하나가, 길바닥 왕빠단인 아큐에겐 현실부정의 묘약이었던 ‘정신승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작가가 100년 전에 보여준 비전으로부터, 21세기의 온라인 공간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