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얼마간 본 영화와 드라마들: <프랑켄슈타인>, <김부장>, <이쿠사가미> 등

2025년을 결산하는 지난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번 달(12월) 들어선 개인 시간을 내기가 참 힘든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연말에 스케줄 관리가 이처럼 빡센 적이 또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다만 그렇게 바쁘고 또 바쁘긴 하지만 수입이 추가로 더 들어오거나 하는 일은 당연히 없다. ㅠㅠ

영화관에 갈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아서(그래봐야 <아바타> 3편 개봉 전까진 볼 작품도 별로 없다) 자연스럽게 내 방 TV 리모컨의 OTT 버튼을 누르게 되었고. 꽤 좋았던 작품도 있고,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작품도 있었다.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오스카 아이작, 제이콥 엘로디 등

<프랑켄슈타인>, 좋았지만 어째 좀 심심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델 토로 감독은 커리어 내내 사실상 ‘프랑켄슈타인’이 조금씩 변주된 작품을 일관되게 만들어왔다. 실제로 그는 “어렸을 적 봤던 할리우드 고전 <프랑켄슈타인>이 무척 인상적이었고 그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한 적도 있을 정도. 그런 만큼 <프랑켄슈타인>이란 본 작품은 감독이 인생을 걸고 도전할 만한 기획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프랑켄슈타인>은 전부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이 (새롭게)만들어졌다. 그렇긴 해도 일생 동안 ‘빠돌이’였다고 할 수 있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2025년에 제시한 비전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선, 본작을 굳이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는 것보단 아예 원작이 된 소설과 나란히 놓고 살펴보는 편이 낫겠다 싶다.

희한하게도 본작은 원작과 비교하여 사뭇 다른 부분이 은근히 많다. 일단 주인공 빅터(오스카 아이작)의 아버지 레오폴드 프랑켄슈타인(찰스 댄스)의 경우, 원작에선 비중이 극히 적지만 영화에선 그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빅터가 ‘죽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 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일 자체에 아버지(에 관한 콤플렉스)가 중요한 촉매제로 작용하기도 했고. 물론 원작에서도 어머니의 죽음이 빅터를 ‘각성’시키는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본작 영화에선 아예 아버지의 직업이 의사. 그런 아버지조차 어머니를 죽음으로부터 구하지 못했다는 점이 부각되어 결과적으로 아버지란 존재의 비중이 그만큼 커졌다는 점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는 델 토로 감독 본인의 개인사와도 관계가 깊다. 원작에서 빅터의 아내였던 엘리자베스(미아 고스) 캐릭터도 비중이 커졌는데, 그녀는 아예 ‘예비 시아주버니’인 빅터, 그리고 빅터가 창조한 괴물(제이콥 엘로디)과 기묘한 삼각관계(?)를 연상시키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아예 원작엔 없는 인물인 하인리히(크리스토프 발츠)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빅터가 수행하고 있는 금단의 연구에 물적 지원을 하는 스폰서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호의 역시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질환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 굳이 따져보면, 숱하게 많은 ‘프랑켄슈타인’, 혹은 비슷한 내용을 다룬 영화에 나온 ‘미치광이 과학자’의 어떤 특징을 따온 캐릭터이기도 하다(그 많은 미치광이 과학자들은 슬쩍 봐도 비용이 무척 많이 들어갈 것만 같은 연구를 끊임없이 한다. 그 돈은 다 어디서 난 걸까? ㅋㅋㅋ).

이러니 저러니 해도, 본작 <프랑켄슈타인>이 원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엔딩에 있다고 하겠다. 평자에 따라선 원작을 역사상 최초의 공포 소설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그런 만큼 원작은 고풍스런 호러의 느낌을 많이 풍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괴물’이, 빅터의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을 남김없이 학살하기도 하고, 빅터는 괴물의 그런 모습을 저주하면서 숨을 거두기에 이른다. 괴물은 창조주의 마지막을 보곤 슬퍼하며 스스로 자취를 감추는 것이 원작의 엔딩.

이를 테면 원작에선 창조주(빅터)가 자신의 피조물(괴물)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반면, 본작에서 빅터는 눈을 감기 직전 괴물을 만나 직접 “아들”이란 언급을 하기도 하고 자신이 저질렀던 그릇된 일들에 대해 사죄의 말도 남긴다. 그런 데다 ‘아들’인 괴물도 ‘아버지’인 빅터를 인정한다는 점이 원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란 것.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본작은 델 토로 감독 본인의 개인사가 크게 투영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델 토로 정도 되는 위치에 오른 거장 감독이 일생의 커리어를 걸고 진행한 기획이고, 스스로 일생 동안 빠돌이였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이,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원작과 크게 다른 것이기도 하니.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지점에서 국내외에서 비판적 의견이 나오고 있는 중.

다만 내용 측면에선 그런 지적이 있다고 해도 시청자(그리고 관객)와 평론가들이 대부분 입을 모아 칭찬하는 부분은 압도적인 스케일과 세트 디자인, 미장센, 배우들의 연기 등 물리적으로 영화를 이루는 사실상 대부분의 요소들이다. 특히 이전까지의 다른 작품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괴물’의 크리처 디자인인데, 아무래도 장르가 장르인 만큼 이전의 괴물들은 의도적으로 공포감을 크게 조성하기 위한 분장을 했다면 본작의 제이콥 엘로디가 분한 괴물은 공포감보단 그로테스크함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원작에서도 괴물을 만들기 위해 빅터가 여기저기서 시체를 공수해서 누덕누덕 기웠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그런 점에선 본작의 괴물이 원작과 오히려 더 가까운 것이기도.

전반적으로 호평을 하는 시청자(관객)들이 많은 가운데,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고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작은 불만은 있다. 그건 어쩌면 본작을 연출한 감독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기예르모 델 토로라는 점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델 토로 감독 작품 치고(?) 너무 매끈하고 심심하다는 것. 뭔가 ‘눈이 확 뜨이고 뒤통수를 쎄게 갈겨버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건데… 하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다. 여전히,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은 <셰이프 오브 워터>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조현탁 연출 / 류승룡, 명세빈 등

딱 김PD와 동년배인 김낙수 부장(전직)

총 12부작인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중, 필자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엔 다른 페친(을 비롯한 많은 페이스북 유저)들이 올린 본 드라마의 감상평이 엄청나게 올라왔다. 당연하지만 극중 주인공인 김낙수 부장(류승룡)의 연배가, 필자를 포함하여 그 많은 페친(들과 페이스북 유저들)에 해당하기 때문.

물론 그저 드라마 주인공과 나이대가 비슷하기 때문에 그들이 큰 호응을 한 것은 아닐 게다. 바로 드라마에서 그려진, ‘김부장’과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서 특별한 페이소스를 느꼈기 때문일 터. 제목이 무색하게도 김부장은 드라마 진행 초반에 진작 대기업에서 명퇴를 당하고, (드라마에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막바지에 가선 아예 서울에서도 벗어나 경기도 인근으로 이사를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배꼽을 잡게 웃기기도 하며, 전반적으로는 짠한 이 드라마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많은 ‘김부장’들로부터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게 가능했던 것에는 현실 밀착형 이야기(나중에 찾아본 건데, 원작인 웹소설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고 한다)가 주효했다고 본다. 그런 데다 주인공 김낙수 역 류승룡 배우의 찰진 연기도 든든히 한 몫 담당했고. 나중에 생각난 건데, 김낙수씨는 수 억 대출을 받아 근사한 상가에 카페를 차릴 게 아니라 진선규를 섭외(?)해서 통닭집을 차리는 게 수익 창출 측면에선 훨씬 나은 선택 아니었을까(‘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ㅋㅋㅋ

다만 작품을 이루는 여러 가지 디테일에선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던 점에선 곱지 않은 지적이 나왔다. 아무리 본사에서 좌천된 임원이라고 해도 지방 공장에 내려가선 개똥 치우는 일이나 한다는 식으로 그려진 점이라든가, 본인 말대로 ‘25년 동안 숫자만 보고 일했던’ 사람이 상가 투자를 위해 대출을 5억 원이나 받는데도 주변 부동산에 한 마디 물어보지도 않는다든가(심지어 부인이 공인중개사 아닌가) 하는 부분들이 그것. 그렇다곤 해도, 적당한 지점에서 현실적이고, 또 적당한 지점에선 거의 판타지라고 생각하고 보고 넘어갈 수준 정도는 되었다고 본다.


<이쿠사가미> 후지이 미치히토 연출 / 오카다 준이치 등

앞으로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쿠사가미>

원작 소설이 따로 있는 작품이고, 현재 넷플릭스에는 원작의 전체 분량에서 채 절반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1시즌만 공개되어 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 여러 사무라이들이 참여하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이는 끝에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내용 덕분에 넷플릭스 공개 전부터 ‘일본판 <오징어게임>’이란 이야기도 들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아무튼 1시즌을 다 보고 나니 본작에 대한 그런 별명이 나름 설득력은 있었다.

<오징어게임> 때도 그랬고, 사실 ‘참가자들이 서로 죽이고 죽다가 한 명만 살아남는’ 이른바 배틀로얄 장르에선 그 살육전의 스펙터클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게 바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이라고 하겠다. 다수의 공인된(혹은 은밀한) 살인 행각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건가? 참가자들은 어떻게 하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건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주인공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당연히 <이쿠사가미>에서도 ‘코도쿠’라 불리는 이벤트에 주인공 사가 슈지로(오카다 준이치)를 포함해서 많은 사무라이들이 참가하는 이유가 주어지고, 정당성도 존재한다. 이제 근대 국가로 넘어가게 된 일본에선, 이제 사무라이 자체가 필요 없어진 존재들이고 아예 그 수준을 넘어서 세상에 더 이상 있어선 안 되는 존재들이 된 것. 그들이 ‘효과적’으로, 그리고 또 대단한 흥미를 자극하면서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면? 이렇게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벤트를, 당대 일본에서 행세 좀 한다는 이들(<오징어게임>으로 치면 VIP들)이 화끈하게 마련한다.

<이쿠사가미> 1시즌은 세계관과 주요 캐릭터들을 설명하는 정도로 끝을 맺는다.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많이 남았기에 평가를 내리기엔 이르지만, 적어도 1시즌에서 보여지기론 액션의 스펙터클은 잘 건졌다고 본다. 이른바 ‘찬바라’라고 해서, 사무라이들이 칼을 들고 싸우는 액션물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배우들의 연기도 그렇고 액션도 그렇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과장된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쿠사가미>에선 별로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칼부림 액션에서도 의도적으로 멋을 부리거나 쾌감을 이끌어내는 연출(물론 본작에서도 조금씩 있기는 있지만)보단 실제로 사무라이들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싸움으로 묘사되는 쪽에 가깝다. 칼과 칼이 부딪히는 합(合)이 무척 잦고, 전반적인 속도가 빠르다. 다소 잔혹한 비주얼도 나오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수준 정도는 아니고 지나고 나면 뭔가 허무함이 밀려오는 느낌도 준다. ‘이 살인은 정당한가? 그래서 내 선택은 옳았나?’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는 것.

앞서 <이쿠사가미>를 두고 일본판 <오징어게임>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했는데, 단순히 그 내용 측면을 보고 붙은 별명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일본 일각에선 <오징어게임>의 대항마(?) 정도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관측된 것이 흥미롭다.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면서 인지도를 넓히고 있는 ‘K-콘텐츠’와 비교하여, 이른바 ‘J-콘텐츠’의 대표 주자로 <이쿠사가미>가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랄까? 아무튼 척 봐도 제작비도 꽤 많이 든 본작은 공개와 함께 일본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차트 1위에 올랐다.


<컴플리트 언노운> 제임스 맨골드 감독 / 티모시 샬라메, 에드워드 노튼 등

밥 딜런은 왜 그 때,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작년에 개봉했을 때 보고 싶었는데, 관람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영화관에선 내려갔고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와서 이번에 보게 되었다. 실존하는 유명 뮤지션이 주인공인 작품이다 보니 당연히 귀가 호강하고, 나중에 찾아보고 알게 된 사실인데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노래와 연주는 실제 배우들이 직접 한 것이라고. 티모시 샬라메는 얼굴만 잘 생긴 게 아니라 이제 기타 연주도 잘 한다!

뮤지션이 주인공인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음악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물론 그렇기에 영화화가 된 것이겠지만)은 일생에서 한 번 이상, 관객인 내가 보기에 참 이상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런 그들의 ‘똘끼’가 음악 역사에 한 획을 남기게 한 바탕이 된 게 아닐까 할 정도. 본작 <컴플리트 언노운>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인들에겐 참 ‘푸근한’ 안정을 제공하는 포크 장르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일렉트릭 사운드를 선보이려 한 것은, 작품 내에서 전후 관계가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조금 당황스럽긴 하다(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미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밥 딜런이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오른 일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밥 딜런은 엄연히 여친이 있으면서도 바람을 피운다든가, 스스로 연인을 떠났으면서도 찌질하게(?) 나중에 다시 찾아간다든가 하는 모습 역시 그렇다. 소심하고 내향적인 성격 때문이겠지만 엄청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 하는 모습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말이지. 그런데 솔직히 “남은 평생 동안 ‘Blowing in the Wind’만 불러야 한단 말야?”하고 소리치는 모습은 어느 정도 공감이 되긴 했다. ^^;;

덧붙이면, 조안 바에즈 역으로 나온 모니카 바바로는 <탑건: 매버릭>에서 홍일점 파일럿으로 나온 그 배우인데 노래 실력이 대단하네. 때론 조안 바에즈보다 노래를 더 잘 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 티모시 샬라메도 밥 딜런 노래를 잘 커버하긴 했지만 사실 밥 딜런이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라곤 하기 힘드니. ㅋㅋㅋ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배우인 보이드 홀브룩도 자니 캐시 역으로 나와 한두 곡 정도를 부르는데 그 또한 노래 실력이 뛰어나다. 자니 캐시는 한참 나이가 든 모습만 기억하는데 젊었을 땐 그랬구나(?).


<제이 켈리> 노아 바움백 감독 / 조지 클루니, 애덤 샌들러, 로라 던 등

할리우드판 김부장(?), <제이 켈리>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제이 켈리(조지 클루니).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인해 자신의 주변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자신의 혈육인 딸들은 물론이고 그 어느 누구 하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 아, 딱 한 명만은 끝까지 그 곁에 남았다. 바로 매니저이자 친구이기도 한 존재, 론(애덤 샌들러).

중년의 남자가 큰 계기로 인해서 일생 동안 하지 않았던 어떤 선택을 한다는 면에선 앞서 이야기한 <김부장>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도 있다. 나름 공통점이 있는 두 작품이, 한국과 미국에서 제작되고 거의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것도 참 흥미로운 부분. 물론 <김부장>의 주인공 김낙수는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보는 인물인 반면 <제이 켈리>의 주인공은 할리우드의 슈퍼스타이고 또한 실제로도 유명 배우인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다는 점이 다르고.

조지 클루니의 개인 사생활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지만, 젊은 시절엔 나름 여성편력이 적지 않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긴 하다. 지금이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조금은 다르겠지. 참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노아 바움백 감독이 솜씨 좋게 일궈냈다. 두 주인공 조지 클루니와 애덤 샌들러 외에 로라 던, 빌리 크루덥, 그리고 철딱서니 없는 제이 켈리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스테이시 키치 같이 나름 유명한 배우들의 호연도 볼만하고.

영화의 마지막, 제이 켈리가 공로상을 수상하는 행사에선 실제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던 많은 영화들의 장면들이 짤막하게 보여지는데 이 또한 은근히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고 난 다음, 금방 든 생각: ‘저 장면들 저작권만 생각해도 빡셀 텐데 저작권료는 다 지불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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