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수염을 기른 이병헌. 그리고 그가 마당 딸린 저택에서 바비큐를 구우면서 어여쁜 아내와 두 자녀, 대형견 두 마리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어쩔 수가 없다>의 첫 장면을 보고 무슨 이유에선지 한국이 아닌 듯싶었다. 게다가 마침 아내 미리(손예진)는 가장인 만수(이병헌)의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외국인 중역에 대한 언급을 하기까지 해서,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한국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곧바로 그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위에 묘사한 모습이 평소에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지 않은가? 뭔가 굉장히 어색한 풍경에서 펼쳐지는 이토록 잔혹한 우화의 첫머리에 느껴진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제부터 그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만수가 25년의 삶을 고스란히 바친 직장은 하필이면 제지회사. 아이들 보는 교과서조차 태블릿으로 나오는 시대가 요즘이다. 한마디로 종이를 만드는 일에 대단한 노하우를 갖춘 전문가가 현재의 직장 말곤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 힘들어진 시대라는 것. 당연하게도(?) 주인공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고, 이제부터 잔혹하지만 웃기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새 직장을 얻기 위해,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경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주인공이 급기야 구직 전선에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스스로 제거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부터가 지금의 자본주의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타깃이 되는 인물인 범모(이성민)와의 대면은 또 어떻고? 둘은 아예 시끄러운 배경음악(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때문에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자막’으로 의사소통을 한다(이 장면은, 단언컨대 박찬욱 감독의 모든 작품의 모든 장면 가운데 가장 웃기는 장면이다! ㅋㅋㅋ).
만수는 어찌저찌 첫 미션에 이어, 두 번째 미션에도 성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과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그런데 제 발 저린 도둑(?)은 가족 중 만수만은 아니어서, 이 가장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들에겐 거짓을 강요한다. 희한하게도,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엄마까지도 아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이 모든 일은, 그야말로 ‘어쩔 수가 없이’ 흘러가는 식.

돌이켜보면, 특정한 선택으로 내몰리는 이들의 모습은 박찬욱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야기 자체가 극단적으로 양식화된 <올드보이>나 <아가씨> 정도는 제외한다고 해도, 박찬욱 감독의 열성적인 팬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복수는 나의 것>이나 <친절한 금자씨>, 그리고 바로 직전의 <헤어질 결심> 같은 작품들에서 대부분 주인공들은 일정한 선택지 안에서 가장 돋보이는 액션을 취했다. 그랬던 부분이, 본작 <어쩔 수가 없다>에선 ‘가정과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그 누가 손가락질을 하거나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군다나 가장의 실직은 우리 사회에 IMF 구제금융 신청에 이은 경제 위기라는 트라우마로 크게 남지 않았나?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은 남는다. 따지고 보면 만수가 분노를 표출해야 할 대상은, 자신과 같은 구직자로서 경쟁해야 하는 이들이 아니라 25년간 소처럼 열심히 일했던 자신을 하루아침에 잘라버린 회사와 그런 선택을 내린 결정권자 아닌가? 노동자들이 서로 맞서게 되는 상황은 그 자체로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론 대한민국 사회에서 참 많이도 보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예가 아파트의 층간소음 문제. 이웃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음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면, 마땅히 불량 아파트를 시공한 회사에게 따져야 할 일 아닌가? 그런데, 실제론 어떤가? 층간소음은 급기야 살인까지 불러일으키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어쨌든 이처럼 통렬한 박찬욱 감독의 비전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젠 일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체하는 게 아니라, 아예 피도, 눈물도, 영혼도 없는 기계가 대체하게 된 세상. 작중 엔딩에서 만수는 결국 새 직장을 얻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의 앞길을 잠시 가로막았던 전자동 짐차(?)나 자동으로 종이의 품질을 확인하는 로봇 팔에 언제 밀레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
결국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본다). 평범한 가장을 어느 날 갑자기 낭떠러지로 내몬 것도, 그가 결국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시도하는 일도, 이 가족이 모두 한통속이 되는 것도, 등장 캐릭터들 중 몇이 그런 결말을 맞이한 것도 모두 불가항력적 상황 때문인 것. 글의 첫 부분에서 언급한, 기묘한 위화감이란 ‘가장 극적으로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순간의 포착으로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어쩔 수가 없다>라는 작품에서 보여진 비전에 대해, 작품 자체에 대해 지지를 보낼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이야긴데, 다 떠나서 ‘실직한 가장이 다시 취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남의 목숨까지 빼앗는’ 이야기를, 이토록 통렬하고 이토록 냉철하며 이토록 웃기게(ㅋㅋㅋ) 그려낼 수 있는 감독은 현재 전세계의 현역들 중 박찬욱을 능가할 이는 없다는 것. 이것 하나만은 장담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