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 딜레마의 해결도 과연 시대 반영(?)

‘트롤리의 딜레마’란 말이 있다.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면 한 명이 희생하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다섯 명이 희생하는 것이 나은가? 나와 직접적인 친분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이라면 당연히 희생자의 수는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희생해야 하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아니면 나 자신이라면?

대저 드라마는 바로 이런 갈등의 양상에서 만들어지고 심화되기에, 일정한 서사를 갖춘 콘텐츠에서 이런 딜레마는 제법 많이 다뤄졌다. 이른바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여친인 메리 제인과 아이들이 가득한 케이블카 중 누굴 먼저 구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고, 배트맨은 역시 여친 레이첼과 하비 덴트 중 누굴 먼저 구해야 하는지 고민했으며, 호크아이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 목숨을 내던진 블랙 위도우 때문에 자책한다.

장대한 서사시였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개인적으론 이 두 편은 한 편으로 셈해야 한다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이후 나온 작품들에 대한 평가와 흥행 성적이 예전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어 마블이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건 더 이상 비밀도 아닌 상황에서, 나름 의욕적으로 출사표를 던진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에도 같은 딜레마가 나온다. 수 차례의 시도 끝에 결국 얻게 된 소중한 2세를 ‘넘겨주면’, 전 지구의 나머지 모든 인류를 살려줄 수 있다고 하는 제안. 이런 제안을 들은 슈퍼히어로 주인공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까?

관객들은 <판타스틱 4>가 채택하고 있는 세계관에서 그 힌트를 얻어 궁금증을 풀 수 있다. 본작의 배경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나, 유기체가 순간적으로 그 위치를 바꾸게 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필름 카메라를 쓰고 브라운관 TV를 보며 LP판에 사운드를 저장하는 시대. 이른바 레트로 퓨처리즘 혹은 카세트 퓨처리즘의 시대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아니라는 것(<판타스틱 4>의 배경은 ‘지구 828’이고 이전까지의 배경은 ‘지구 199999’이다. 앞으로 MCU에서 새 작품이 나올 때 이렇게 서로 다른 지구를 넘나드는 이벤트는 계속 벌어질 것이고 이에 대해 나중에 별도의 지면을 통해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미래이면서 과거인, 이 독특한 시대상에서 우리는 낭만주의와 낙관주의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미국으로선 냉전의 위협만 빼면 사실상 가장 풍요롭고 다수가 행복했던 ‘벨 에포크’이기도 한 시대에, 가장 두려운 트롤리의 딜레마에서 우리의 ‘슈퍼히어로’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내 아이를 위해 모든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위해 내 아이를 희생시키지도 않을 것”이라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한 셈.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가족’의 힘으로, ‘어머니’의 힘으로, 가능하다.

미래이면서 과거, 과거이면서 미래인 시대의 슈퍼히어로들

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가족애를 강조하지만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에선 참 드물게도 실제 혈연으로 이어진 진짜 가족이 등장하는 <판타스틱 4>에서, 수 스톰(바네사 커비)이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건(그것도 그녀에 대한 적의로 가득한 군중들 앞에서! 역시 정치 지도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 초능력 캐릭터들이 입은 쫄쫄이 유니폼 색깔만큼이나 대책 없는(?) 낭만주의, 혹은 낙관주의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전술했듯이 그 어려운 미션을 성공으로 이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의 덕도 보고. 바로 그 ‘미래이면서 과거’인 시대의 반영이 오늘 우리가 만난 <판타스틱 4>인 것이다.

그러니 본작이 참 희한한 레트로 퓨처리즘을 표방한 것도, 그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지구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획기적 모멘텀이 필요한 MCU로서 성공적인 시도로 보이긴 하지만, 그것이 영화 팬으로서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으로 느껴진다는 이야기는, 불행히도 아니다.

앞서 갈등이 있어야 이야기가 재미있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에서 갈등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게 작용하는데, 예컨대 주인공과 악당 사이의 갈등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주인공이 외부 세계와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전까지의 MCU 작품들을 보면, 드라마의 깊이가 가장 깊어지면서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졌을 땐 역설적이게도 슈퍼히어로 진영 내부에서의 갈등이 증폭되었을 때다. 급기야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맞서게 되었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말할 것도 없고, 따지고 보면 <어벤져스> 1편도 공동의 적인 치타우리(그리고 로키)가 뉴욕을 침공하기 직전까지도 이 히어로들은 서로 싸우기 바쁘지 않았던가?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썬더볼츠>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판타스틱 4>가 영 심심하게 느껴지고,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 치고 ‘도파민이 뿜뿜 하는 액션 장면도 적다’는 평가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당연하지.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득 담은 가족 드라마니까. 인류가 맞닥뜨린 최강의 적은 그저 모성애로 물리칠 수 있으니까(방금 쓴 이 표현은 비아냥거리는 게 전혀 아니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작품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는 알겠다. 그리고 앞으로 MCU가 나아갈 길에 대해 일종의 방향타를 제시한 작품이란 데에도 동의한다. 덧붙여서 본작의 쿠키 영상에도 나온 것처럼 앞으로 나올 <어벤져스> 시리즈, 그러니까 <둠스데이> 등의 작품에서 다른 누구도 아니고 ‘판타스틱 4’의 캐릭터인 리드 리처드, 수 스톰과 조니 스톰, 그리고 벤/씽 등이 큰 역할을 할 것이란 미디어의 언급(케빈 파이기의 인터뷰를 통해 기사화된)도 수긍하게 된다.

마무리를 지으며: 그럭저럭 나쁘진 않게 봤는데,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흥행 성적은 생각보다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제일 큰 시장인 북미에서 개봉 성적은 좋았지만 2주차, 3주차를 지나며 관객이 뚝뚝 떨어지고 한국에선 개봉 3주차이긴 하지만 주말에도 조조 1회만 상영하고 있을 정도로 빨리 내려가고 있으니(까딱 잘못했으면 못 볼 뻔). MCU의, 그리고 슈퍼히어로 장르의 팬으로서 조금 안타깝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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