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피스는 시대와 함께 완성된다: <하얼빈>

“조선이란 나라는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인데, 백성들은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단 말이지”

-이토 히로부미

정신세계가 약 30여년 전에 멈춰있는 걸로 보이는 한 멍청이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좀비들 때문에, 연인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엄동설한에 광장으로 나섰다. 그 많은 사람들과 뜻을 함께 하고 싶지만 사정상 광장에 나서기 어려운 사람들은 인근 식당과 카페에 선결제를 하고 다양한 물품을 보내기도 하면서 그들을 응원했다.

영하의 날씨에, 함박눈이 내리는 길 위에 그 누가 밤을 새워가며 있고 싶겠는가. 보통 비장한 각오가 아니면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그들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고 떠들고 흥겨운 노래까지 불러가며 있는 힘껏 ‘즐긴다’. 지치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그들은 서로 연대한다.

지금으로부터 1백여년 전 이 땅을 무력으로 침탈한 자들의 눈에는, 정말로 유전자 단위에 각인되어 있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이 ‘국난 극복의 의지’가 참으로 이상하고 희한하게 보였으리라. 어쩌면 <하얼빈>(우민호 감독 / 현빈, 이동욱 등 출연)에서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의 대사가 무척 절실하게 들린 것은, 당연하게도 서기 2025년에 대한민국 시민들이 맞이한 참담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현빈)은 추레한 차림으로 얼어붙은 강을 어렵게 건넌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직전에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포로로 잡은 적군 장교 모리(박훈)를 ‘만국공법(오늘날의 국제법 혹은 제네바 협약 정도)’에 따라 석방했는데 그가 광복군의 본거지를 포격하며 대부분이 몰살당했기 때문.

겨우 목숨을 건져 블라디보스톡의 광복군 아지트로 살아 돌아온 안중근에겐 동지들의 차디찬 시선이 꽂힌다. 그리고 결연한 의지를 피력하는 안중근.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해 사는 것이며, 조선을 침탈한 ‘늙은 늑대’를 반드시 죽여 없애겠다”고.

“늙은 늑대를 반드시 죽여 없앤다” 손가락을 자르며 맹세하는 안중근(현빈)

영화에선 정말 희한할 정도로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다. 조명 또한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엄밀히 따지면 그 자체가 세심하게 연출된 것이지만) 스크린에서 전달되는 묵직한 느낌에다 등장인물들의 대사 톤까지 더해져서 꼭 연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많이 보진 않았지만 대략 1950년대부터 70년대 정도까지 나온 프렌치 느와르 장르의 작품 같은 느낌도 든다. 전체적으로 대규모 제작비가 들어갔고 이름값 높은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 치고는 상업성이 떨어지고 오히려 아트하우스 영화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지루하거나 심심한 영화라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구현된 형식미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정말 잘 맞아떨어진다.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신파의 요소는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넣지 않은 것이나, 대부분의 장면을 그대로 스틸로 써서 포스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미장센,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가 합쳐지기까지 감독의 연출은 그야말로 천의무봉에 가까운 솜씨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의 우리 모두가 안중근이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게 만든,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을 보자. 이전에 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으로, 가장 스펙터클하게 묘사된 바로 그 장면은 <하얼빈>에선 극부감으로 그려져 솔직히 누가 누군지 구분조차 힘들다. 기름기를 쪽 뺀 이 장면에 대해 우민호 감독은 “먼저 간 광복군 동지들이 하늘에서 본다는 느낌을 살렸다”며 “일반적으로 대중이 원하는 장면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울려 퍼지는 외침. “까레아 우라(대한독립 만세)!”

거의 모든 장면의 미장센이 예술적으로 아름답다

현빈의 경우 이전까진 솔직히 연기 잘 하는 배우란 인식이 별로 안 드는 게 사실이었으나 적어도 <하얼빈>의 주인공 안중근 역이 ‘인생 배역’이 되었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가상의 인물인)김상현 역 조우진 또한 ‘더 이상 훌륭할 수 없는’ 역할을 맡아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였다(개인적으론 어떤 시상식에서든 조연상 하나는 무조건 딴다고 본다). 우덕순 역 박정민과 공부인 역 전여빈, 이창섭 역 이동욱까지 모두 감독의 디렉팅을 성실히 따르며 어느 것 하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럴 때가 있다. 그 작품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결국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 거기에 작품 자체의 완성도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가 없어지는 것. 진짜 훌륭한 작품이란 결국 시대정신을 담아내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시대와 공명하는 작품이야말로 마스터피스가 되는 것. 적어도 지금의 시대에 <하얼빈>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위선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얼어붙은 두만강 위에 쓰러졌던 안중근 장군이 분연히 일어나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모습에서 흐르는 내레이션은 21세기의 우리에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마지막의 내레이션은 큰 감동이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 앞에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아니된다.
금년에 못 이루면 다시 내년에 도모하고, 내년, 내후년, 10년, 100년까지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그만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앞에 나가고, 뒤에 나가고, 급히 나가고, 더디 나가고, 미리 준비하고 뒷일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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