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역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중 <환희의 송가> 위주로)

우선 하나 고백하자면, 시국이 시국인지라 최근엔 영화고 드라마고 뭐고 마음 놓고 편하게 즐기질 못했다. 많은 이들이 마찬가지겠지만 퇴근하고 들어오면, 혹은 휴무일이면 정신 없이 쏟아지는 뉴스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취향’ 코너에 마땅히 올릴 만한 콘텐츠 리뷰를 작성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지속 업데이트는 하고자, 나름 시즌에 어울리는(?) 리뷰의 대상을 하나 떠올려봤다. 그 이름은, 바로 베토벤 교향곡 9번(중 4악장의 <환희의 송가>). 클래식 음악 역사에 남은 명곡이기도 하고 곡 해석이나 편곡에 있어서도 굉장히 난이도가 높다고 알려지기도 해서, 클래식이라면 문외한에 가까운 내가 굳이 리뷰라고까지 할 만한 글을 작성하긴 힘들고(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지휘자가, 서로 다른 교향악단에서 연주한 곡을 전부 따로 듣고서 각각의 리뷰를 작성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저 해당 곡에 대해 주변의 잡다한 지식들, 말하자면 ‘트리비아’ 정도에 속하는 내용을 읊어보고자 한다.

앤드리스 넬슨 지휘 / 시티 오브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2015)

요즘은 조금 덜한 듯한데, 예전엔 유독 연말 시즌에 방송이나 길거리에서도 많이 들렸던 곡이다(그런데 요즘은 길거리에서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저작권 관련 문제도 있고 경기가 워낙 바닥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작곡은 누구나 알고 있듯 루드비히 판 베토벤. 교향곡 9번이라 함은 그가 작곡한 9번째 교향곡이고 그 다음인 10번 교향곡은 미완성으로 남은 채 사망했으니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그리고 4악장의 ‘합창’은 역시 독일 출신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 작사. 하지만 실러가 썼던 시 전체가 그대로 가사가 된 건 아니고 일부만 곡에 실렸다(원작은 분량이 꽤 많다). 참고로 실러가 베토벤보다 조금 전 세대에 활동을 했는데 베토벤이 평소에 실러를 굉장히 좋아하기도 하고 존경하기도 했다고 한다.

베토벤과 실러 모두 독일 사람이니, 당연히 독일에선 인지도가 굉장히 높은 곡이기도 하며 여러 매체에서 직접적으로 인용되거나 조명되었다. 대표적으로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이 통일되기 전, 그러니까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져 있을 당시 두 나라가 단일팀을 구성해서 하계 동계 올림픽에 출전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독일 단일팀이 금메달을 땄을 때 시상식에 국가 대신에 <환희의 송가>가 나왔다고 한다(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이 출전을 했는데 여자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단일팀 코리아가 금메달을 땄을 때 <아리랑>이 앤썸으로 나왔다).

이 곡이 출연한 대중문화 콘텐츠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한 건 <다이하드> 1편일 듯. 테러리스트들이 나카토미 빌딩의 금고를 열려고 하는데 잘 안 되다가 금고 문이 딱 열릴 때 <환희의 송가>가 변주되어 나온다. 이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랬겠지만, 이후 <다이하드>의 새 시리즈가 나올 때 예고편에 의도적으로 환희의 송가가 BGM으로 사용된 적이 있을 정도. 그리고 또 유명한 다른 작품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나기사 카오루가 에바 2호기를 가동시킬 때 <환희의 송가>가 나오는데 이 장면은 예전 TV판에도 나오고 새로 공개된 극장판에도 나온다. 그 외에도 <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에선 4악장 대신 2악장이 나온다.

인류 역사상, 아마도 가장 유명한 곡을 작곡한 음악가 베토벤

한편 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 곡이 독일에선 그렇게 인지도가 높은 곡이긴 하지만, 정작 본토인 독일이나 미국에선 그렇게 연주가 많이 되지도 않고, 유독 우리나라하고 일본만 이렇게 연말에 집중적으로 연주된다고 하는데 조금 희한하다(?).

요즘은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예전에 우리나라는 많은 문화 콘텐츠들이 일본을 통해 수입된 역사가 있고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일본에서 이 곡이 그렇게 큰 인기였던 것. 그렇다면 일본에선 왜 베토벤 9번 교향곡이 유독 그렇게 연말에만 울려 퍼지곤 했는지 궁금해지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어떤 측면에선 이게 군국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같은 추축국이었던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독일에서 전쟁 당시 전쟁을 정당화하고 국민들의 애국심, 쉽게 말해서 국뽕을 자극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일본이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된 학생들에게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들려줬다고 하고. 다만 이후 상황에서 살짝 차이가 있다면 독일은 패전 이후에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에 대해 언급을 하는 것조차 터부시될 정도가 되면서 본토에선 연주되거나 조명되는 일이 적어졌지만 일본은 여전히 그 영향 하에 있다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 조금 다른 측면의 이야기도 있다. 애초 독일에서 프로파간다에 열심히 복무할 수밖에 없었던 곡이긴 하지만 교향곡의 전체적인 구성이 매우 웅장하고, 대곡이란 점에서 연말 연주회에 잘 맞는 곡이란 시각도 있는 것. 무엇보다 불세출의 음악가인 베토벤의 대표작이란 점에서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주회에 잘 어울린다는 것.

따지고 보면 가사의 의미도 인류애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노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원래 실러 자체가 군주제를 반대하는 성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 아무튼 이렇게 다양한 트리비아들이 존재하는, 어쩌면 인류 역사상 손꼽힐 만큼 유명한 곡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도 2024년 겨울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이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고 가장 중요했던 곡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

2024년 12월의 어느 날, 여의도에 모인 1백만의 민주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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