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30도를 넘나드는 한낮의 무더위는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제 새벽녘에는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때가 되었다. 어느덧 추석도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왔고, 그 동안 틈틈이 즐겼던 영화와 드라마들에 대한 소감을 정리할 때도 되었다. 고백하자면, 단독 타이틀(의 형식을 빌어, 취향 코너에 정식 리뷰)로 소개할 만한 콘텐츠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글 작성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렇게 ‘짤막 소감’으로 전하게 되었다.
역시 직장인이 퇴근하고 난 다음이나, 휴무일에 혼자서 뭐 하는 건 정말 힘들어. ㅠㅠ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모완일 감독 / 김윤석, 고민시, 윤계상, 이정은 등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내용의 내레이션으로 모든 에피소드가 시작하는 것부터 특이한데, 약 20여 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이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묘한 구성의 플롯도 흥미롭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는, 단연코 2024년 하반기 초입에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모은 작품들 중 하나였다.
첫 예고편이 공개되었을 당시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는 미스터리 스릴러일 걸로 많은 이들이(나 포함)생각했는데, 굳이 장르 구분을 하자면 스릴러가 맞긴 하지만 그보다는 막장극(…)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고 보니 연출자 모완일 감독이 본인의 이름을 가장 크게 알린 전작은 바로 <부부의 세계>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근사한 풍경이 펼쳐진 시골에서 전영하(김윤석)가 운영하는 펜션에 묘령의 여인 유성아(고민시)가 묵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여인은 아들뻘 치고는 조금 커 보이는 남자아이와 함께 왔는데, 체크아웃을 하고 나갈 때 보니 아이가 없어졌다?! 한편, 역시 근사한 풍경의 강변 옆에 세워진 모텔 레이크뷰를 운영하는 구상준(윤계상)은, 자신의 모텔에 잠시 묵었던 연쇄살인범 지향철(홍기준) 때문에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경험을 하고, 극도로 피폐한 인생을 살게 된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가 극단적으로 나뉘는 평가를 받고 있는 데에는, 당연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 이유에 수긍하는 편이다. 우선 비판적인 의견부터 살펴보자. 전술했듯 본작은 두 가지 사건을 큰 축으로 해서 전체 이야기가 흘러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와 같은 구성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제시되는 게 아니고 전체 시리즈에서 적어도 1/3 정도는 지나야 시청자들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가 주어진다. 즉, 친절하지 않은 구성이란 것.
게다가 두 사건을 모두 관찰하고 개입하는 인물인 경찰 윤보민 역으로 이정은 배우가 캐스팅되었는데, 이정은 배우가 누구던가. <기생충>을 비롯해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얼굴을 비추면서 ‘어쨌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배우’란 인식을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본작에선 그 역할이 굉장히 미미한 수준이다. 말하자면 시청자들의 기대를 배신한 캐스팅(?)이라고나 할까? 좀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본작을 본 시청자라면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 사건이 큰 틀에서 하나로 만나는 지점과 과정에, 그렇게까지 크게 공감하기 힘들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영하가 본인의 펜션에서 일어난 사건과 비슷한, 과거의 사건을 ‘어쩌다 보니’ 접하게 되고 나름 그 사건에 개입해볼까 하는데, 솔직히 지금 그가 20여 년 전 일에 신경이나 쓸 상황인가? 당장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런 데다 과거 사건의 피해자인 구상준의 가족 중 아들인 기호(박찬열)는 정말 뜬금없는 방식으로 나름의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고. 이게… 우리나라에서 가능이나 할 법한 일인가?

이렇게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개인적으론 재미있게 봤고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다.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단연 배우들의 열연. 김윤석, 윤계상, 이정은 등의 배우들이야 원래부터 뛰어난 배우들이니 굳이 설명을 붙일 필요도 없고, 고민시 또한 엄청난 ‘미친X’ 연기로 나름 유구한 이 분야(?)에 이름을 올렸다. 다만, 사이코패스란 캐릭터 설정으로 시작해서 점점 갈수록 ‘그냥 선 넘은 미친X’이 된 것만 같은 점은 불만.
한 가지 덧붙이면, 유성아 캐릭터의 설정을 두고 우리나라에서 실제 벌어졌던 사건의 실제 범인(당연히 현재는 구속 수감 중)을 모델로 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꽤 많이 제기되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꼭 그렇게까지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캐릭터 구상 자체는 실제 인물로부터 시작했을 수는 있을지언정 ‘특정 캐릭터 = 특정 (실제)인물’이란 인식에 굳이 갇힐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본작은 화면의 질감도 매우 인상적이다. 전영하의 펜션 주변으로 정말 근사한 풍경이 펼쳐지는데 촬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마치 북유럽 국가 어느 곳 같다는 느낌도) 빽빽한 숲이 호수를 주변으로 이어진다. 포스트 프로덕션 부분에서 색보정을 정말 빡세게 한 듯.
또한 본작을 지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라는 이 드라마가 은유하고 있는 메시지에 가장 크게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큰 나무가 쓰러지면서 쿵, 하는 소리가 났는지 안 났는지 누가 궁금해할까?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본작의 영어 제목은 <Frog>이다)를 누가 신경 쓸까? 그런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 벌어졌던 사회적 참사(예컨대, 세월호 참사나 10.29 이태원 참사 등)의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해 우리가 정말 깊게 공감하고 진정으로 아픔을 나누긴 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마지막의 해석은 좀 과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뭐,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니. 어쨌든 다시 이야기하지만 꽤 재미있게 본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겠다.
<악마와의 토크쇼> 콜린 케언즈, 카메론 케언즈 감독 / 데이빗 다스트말치안 등

극장 개봉 당시 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금방 내려가서 관람 시기를 놓친 영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얼마 안 지나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어 냉큼 봤다. 역시 넷플릭스 최고! ㅋㅋㅋ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기는 했다. 때는 1970년대. 시청률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는 심야 토크쇼 진행자 잭 델로이가 자신의 쇼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야심적인 기획을 세운다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 그 야심적인 기획이란?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무척이나 기발하고 신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아이디어가 생각만큼 엄청나게 기발하지도, 신선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재치 있는 구석이 있었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봤다. 역시 호러 장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재능을 보다 쉽게 발휘할 수 있는 놀이터가 맞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존 카펜터, 샘 레이미, 제임스 카메론 같은 쟁쟁한 이름들에서 우리는 그 근거를 볼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영화 전체 러닝타임이 약 100분 정도로 그렇게 긴 편은 아니지만 토크쇼가 주 무대가 되는 점에서 알 수 있듯 대사가 무척 많고 자막도 그만큼 많다. 게다가 내 짧은 영어 실력에 비추어서도 의역이 상당히 많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1970년대 미국에서 자주 통용되던 관용적 표현도 꽤 많이 나왔을 듯. 요런 걸 잘 아는 이라면 더 큰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겠다.
<폭군> 박훈정 감독 / 차승원, 김선호, 김강우, 조윤수 등

솔직히 박훈정 감독은 커리어 내내 부침이 있었고, 그를 좋아하는 팬도 싫어하는 안티 팬도 있는 와중 개인적으론 그를 지지하는 쪽에 가까웠다. 어쨌든 꾸준히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계속 작품을 내놓는 자체가 창작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조금 희한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바로 ‘전체 줄거리를 몇 마디로 쉽게 줄일 수 있는’ 내용이란 것. 데뷔작인 <혈투>를 볼까? ‘서로 영 껄쩍지근한 사이의 세 남자가 좁은 공간에 갇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싸우는’ 내용이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세계>는? 당연히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이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혼란을 겪는’ 내용이다. 실패작이라고 할 <V.I.P.>의 경우를 보자. ‘국정원이 기획탈북시킨 북한 고위층의 자제가 연쇄살인범’이다!
이는 감독이 커리어를 시나리오 작가로 시작했고, 제작자 앞에서 피치를 최대한 짧게 하는 것이 미덕이란 사실을 몸소 체험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어쨌든 박훈정 감독은 이번에 처음으로 OTT(디즈니 플러스)에서 역시 처음으로 드라마를 연출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폭군>.
인간의 신체 능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약물을 개발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와중, 모종의 사고로 이 약물이 분실되고 이를 되찾기 위해 국정원과 미국의 정보기관이 맞선다. 이런 내용만 보면 연상되는 점이 있다. 바로 <마녀>.
<폭군>은 공개 전부터 박훈정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인 <마녀> 시리즈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이 알려져 화제가 되었는데, 일단 세계관 공유가 맞긴 하지만(그렇게 보이긴 하지만) 특정 캐릭터(배우)의 출연 등 직접적인 연관성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드라마라곤 하지만 40분 가량의 에피소드 4편이 느슨하게 이어진 점을 봤을 때, 영화 한 편을 억지로 드라마로 늘려서(?) 공개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
한국영화/드라마에선 보기 드문, 초능력자의 화끈한 배틀이 펼쳐지고, 치열한 총격전도 벌어지며, 쿨한 척하려 애쓰는 캐릭터들이 시시껄렁한 농담을 서로 던지는 등, 여러 모로 감독의 인장이 그대로 박혀있는 작품이다. 참, 이 정도로 개인의 취향을 명확하게 반영한 작품도 드물지 않나 싶다(하다못해 여자 주인공의 외모까지도 그렇다!). 심지어 연상호 감독도 이 정도(?)는 아니다!
글을 정리하고 보니 분량이 결코 적진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본 글에 더 붙이고 싶은 작품들도 있는데 요번엔 이 정도로 정리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이만 줄이기로 한다. 다음에 새 꼭지에서 다른 작품 리뷰를 소개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