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네임’,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이야기에 대하여

한 여고생이 있다. 조직폭력배의 딸이라는 멍에로 인해 학교에선 왕따 신세.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합리한 처사에 화끈한(!) 폭력으로 맞서고 학교를 스스로 뛰쳐나오면서 이런 말을 던진다. “조폭 딸이면 이 정도는 해야지, 씨12팔.” 그러던 중 그래도 소중하게 여겼던 아빠가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하고, 스스로 정의구현에 나서고는 싶지만 아직은 구체적인 방법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아빠가 속해있던 조직의 보스가 복수의 방향을 제시한다. “네 아빠를 죽인 건, 경찰이다.” 이제 조폭 아빠를 여읜 딸은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과 신분)으로 경찰에 투신, 아빠를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선다.

여기까지가 넷플릭스의 새 오리지널 시리즈로 선을 보인 한국 드라마 ‘마이 네임’ 도입부의 줄거리. 참으로 익숙한 이야기, 참으로 익숙한 전개, 그리고 참으로 익숙한, 결말? 결말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더 자세히 하기로 하고, 우선은 일반론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사람들은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기 마련이다. 주인공 혼자서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악당을 때려눕히는 그림은 물론 그 자체로 볼 만 하겠지만, 여기서 주인공이 근육질의 마초라면 솔직히 감흥은 그렇게 크지 않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여성 캐릭터 단독 주연의 액션 장르. 그리고 이렇게 여성 캐릭터가 혼자서 맨몸으로 부딪히는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큰 부상을 당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들의 인식을 낯선 곳으로 초대하고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게 하기 위함이다. 아니, 악당 서너 명하고 혼자 붙어서 이기는 건 남자도 힘든데 여자가 이겨버리네? 어이쿠, 큰 상처까지 입고? 저걸 어쩌나.

사람들이 익숙해하는 상황에 전복이 일어난 광경 자체가 강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 여성 캐릭터 주연의 액션 장르가 갖는 장점이라면, 그 반대편에 단점도 존재한다. 잠깐, 지금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지간한 남자조차 일대일 격투가 힘든데, 여자가 혼자서 악당 여럿을 주먹싸움으로 이기는 게 가당하기나 한 말이냐’라는 뜻이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따져야 할 것은 내러티브의 설득력이지, 물리적 현실성이 아니라는 이야기.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가장 큰 소비층은, 어차피 둘 중 하나이긴 하지만, 남자 관객(시청자)이다. 주 소비층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장르의 임무임을 알고 있다면, ‘마이 네임’과 같은 이야기가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단점도 명백해진다.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서사에서, 주인공이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생명력(혹은 가치)을 부여하기 위해 그 옆에 이성애자인 남자 조연을 세우는 것은, 가장 세심하고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여야 하는데 ‘마이 네임’에선 그런 고민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런 방식이 제일 쉬운 방식이긴 하다. 그래서 주의해서 써야 한다고 한 것이고. 덧붙이면 ‘여성 캐릭터 주연에 누가 봐도 명백하게 썸 타게 생긴 남성 캐릭터 조연’이라는 한계(혹은 아이러니)를 나름 극복하기 위해 애썼던 다른 영화들이 이미 많다. ‘마녀’(박훈정 감독, 김다미 주연)는 아예 주인공을 초능력자로 설정하는가 하면, ‘악녀’(정병길 감독, 김옥빈 주연)는 현란한 촬영과 편집 자체가 주인공이라고 할 만했다. ‘마이 네임’ 촬영 중 주연 한소희가 많이 참고를 했다는 영화 ‘올드 가드’에서 주인공은 사실상의 슈퍼히어로이자 호모섹슈얼이고 ‘아토믹 블론드’의 주인공이 미션 완수가 무엇보다 중요한 냉전 시대의 첩보요원(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은 샤를리즈 테론)인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그녀들은 남성 관객(시청자)들의 노골적인 요구를 거부했을지언정, 그녀들에겐 그저 짤막한 멜로의 상대역으로밖에 기능하지 못하는 남성 캐릭터 조연은 필요가 없었던 것.

말하자면, 익숙한 이야기라도 조금은 더 세련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면 지금의 아쉬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것이다. ‘마이 네임’은 마치 익숙한 골목에서 길을 잃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여기저기서 참 많이 봤지만 그래도 여전히 매력적인 설정과 세계관과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이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추신: 주연을 맡은 한소희 배우는 액션 연기를 위해 무척 많이 준비하고 열심히 훈련을 받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부분은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글을 쭉 써놓고 보니 ‘마이 네임’이란 드라마 전체가 영 별로인 것처럼 느껴지는 듯해서 괜히 미안한 마음에(?) 덧붙이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액션도, 초반엔 다양한 타격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일정한 콘셉트로 짠 합(合)을 보여주기도 하다가 후반부에 가면 다양한 지형지물을 활용하기도 한다. 다만 맨 마지막, 동천파 보스 최무진과의 일대일 액션은 어째 좀 심심… 물론 그 전에 HP가 다 소진되었기 때문이긴 하지만 역시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