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항상 새롭게 다시 쓰이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은 미국의 역사학자 칼 베커다. 이 학자의 멋진 말을 굳이 따르지 않더라도,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 / 황정민, 정우성 등 출연)을 보고 나면 2023년의 ‘누군가’가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일을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참 절묘한 건, 이 영화가 개봉한 11월22일은 전두환이 곱게 죽은 지 딱 2년이 되는 날로부터 하루 전이란 것.
역사란, 다른 이야기로 하자면 서스펜스다. 말하자면 이야기 전부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만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른다는 것. 따지고 보면 ‘진짜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순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이름이 낯설지만 실존 인물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지 절대 모를 수가 없는)전두광, 노태건 등 쿠데타를 모의하는 세력은 자신들의 작당이 정말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이태신을 비롯한 이들은 원하는 결과를 이룩하기 위해 정말 끝까지 가려고 한다.
※ 여기에서 잠깐 12.12 당시의 실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세간의 인식과는 사뭇 다르게,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 황영시 등 하나회 소속의 쿠데타 주모자 및 가담자들은 전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두환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영화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일단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정승화 참모총장 체포 재가를 받아오겠다던 전두환의 호언장담이 1,2차 시도에도 실패하자 일부 인원들 사이에선 ‘저놈을 끝까지 믿어야 되나’라며 슬금슬금 발을 빼려는 움직임도 있었던 것이 사실. 당연하지만 쿠데타가 결국 성공으로 이어지자 하나회는 모두 전두환을 열성적으로 ‘빨아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어쨌든 영화에서 그려진 사건의 결말은 이미 알려져 있다. <서울의 봄>을 본 관객들 사이에서 많이 쏟아지는 호평 중엔 “다 아는 일인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연출이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면 시작으로부터 약 1/3 지점까지의 부분은 주요 캐릭터를 명확하게 잡아주는 한편 배경이 되는 사건(10.26과 하나회의 준동 등)을 빠르게 일별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 하나회가 참모총장을 결국 강제로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날 밤 첫 총성이 울린 시간으로부터 이튿날 새벽 대통령으로부터 ‘사후재가’를 받아내기까지, 즉 12.12 쿠데타의 전모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은 마치 지상파의 시사 르포처럼(자막과 지도 등의 그래픽, 화면 분할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무척이나 긴박하게 묘사한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쿠데타는 당시만 해도 주동자들마저 정말 성공할 것인지 예측을 할 수 없었기에 더욱 성공적으로 영화에서 그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전체적인 밸런스가 아주 잘 잡혔다. 인물과 인물이 부딪히고, 사건과 사건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그려지는 숨가쁜 서사. 모두가 촬영, 편집, 그리고 연출 등 영화를 완성시키는 모든 물리적인 요소가 김성수 감독의 유려한 지휘 하에 성공적으로 복무한 결과다.

이번엔 배우 이야기를 할 차례. 배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감독은 <서울의 봄>에 출연한 배우들이 ‘어떻게 해야 실제 인물과 더 비슷하게 보일지’에 대해선 애초부터 고민을 하지 않은 듯하다(물론 황정민의 대머리 가발이 우스꽝스럽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저 ‘황정민이란 배우가 연기하는 전두광이라는 캐릭터’와, ‘정우성이란 배우가 연기하는 이태신이라는 캐릭터’를 영화에서 어떻게 그릴지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감독의 그와 같은 고민은 탁월한 성과로 나타났다.
전두광은 기필코 권력을 잡고야 말겠다는 야욕의 화신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위해 ‘몸빵’을 서슴지 않는 부하마저 차로 밀어버리는 인물. 동시에 만나는 사람들과 친밀해지기 위해서 어깨동무도 하고 포옹도 하는 등 짐짓 과장된 제스처와 너스레를 떠는 인물이기도 하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실제 전두환도 그랬다고.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그는 희대의 악당인 한편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긴 하다.
반면 이태신은 그야말로 정중동에서 ‘정’에 해당하는 인물. 정치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고 오로지 군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신념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런 한편으로 가족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부하가 희생되지 않기를 바라는, 정말 이상적인 군인. 개인적으론 정우성이란 배우가 장태완 장군이 모델이 된 캐릭터에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의 김기현 배우가 분했던 장태완의 유명한 대사(“너희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탱크를 몰고 가서 네놈들의 머리통을 어쩌구 저쩌구~” 하는)를 할지,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할지 정말 궁금했는데 영화에선 그저 낮게 읊조리는 정도.

그렇지만 그 장면을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속에서 천불이 일고 있는 이태신, 아니, 정우성을 봤을 것이다. ‘영화배우’ 정우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비트>의 민이를 꼽는 영화 팬들이 적지 않을 텐데 그것도 벌써 거의 30년이나 됐다. 개인적으로 <서울의 봄> 속 이태신은 정우성의 역대 최고 퍼포먼스이며, 그 자신이 올곧은 신념의 소유자인 정우성과 가장 찰떡인 ‘인생 캐릭터’가 되었다고 본다.
영화업계에선 비수기로 꼽히는 11월에 개봉했음에도 글을 작성하고 있는 날짜 기준으로 <서울의 봄>은 개봉 2주차에 손익분기점 460만 명을 돌파했다. 그리고 연말에 초대형 블록버스터 <노량>이 개봉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경쟁작이 없어 그 흥행 추이 또한 꽤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면 <서울의 봄> 흥행을 견인하고 있는 관객층은 의외로 20대~30대라고 한다. 김PD가 영화를 볼 때에도 바로 왼쪽에 거의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커플이 앉아있었고. 그리고 그 중 여자 관객은 마지막 부분 이태신 장군이 바리케이드를 성큼성큼 넘어갈 때 정말로 ‘입틀막’을 시전했다(!). 그러더니 엔딩에선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얼핏 보였을 정도. 대한민국 역사를 유린한 이 무뢰배, 불한당들을 젊은 세대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일반화일까? 제목은 <서울의 봄>이지만, 영화의 계절적 배경은 겨울이고, 이듬해인 1980년에는 ‘봄이 왔으되 봄이 아닌’ 상황이 이어졌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붙이는 한 마디. 전두환, 이 작자는 너무 곱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