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들어가며: 익히 알려졌다시피 제임스 건 감독이 DC 필름스의 공동 대표로 취임하면서 DCU 세계관 소속 모든 영화들의 전면 리부트를 천명했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DCU 영화들은 모두(배우들을 포함해서) 없었던 것이 되어버렸는데… 아무튼, 그 ‘이전’ DCU 세계관의 마지막 영화가 바로 <플래시>가 되었다(이 부분에 대해선 보리스 매거진에서도 진작 소개한 바가 있다 / 링크: 제임스 건 휘하의 DC, 모든 것을 바꾼다). 이와 같은 ‘어른의 사정’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면서 리뷰를 시작하려고 한다.
빛보다 빠르게, 세상 어디든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존재가 있다. 이 슈퍼히어로의 능력은 워낙 탁월해서, 공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시간까지도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드라마’는 바로 여기에서 만들어진다. 어렸을 적 겪은 어머니의 사망 사건을 되돌리기 위해, 그리고 부인을 살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이 능력을 쓰고자 한다.
이어서, ‘어떤 식으로든’ 시간여행을 다뤘던 수많은 영화에 나온 바로 그 테마도 (당연히)조명된다. 이른바 시간여행의 패러독스. 미래에서 온 한 시간여행자가 과거의 어떤 한 순간으로 가서 벌인 일 때문에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흔히 아주 나쁜 쪽으로)영향이 끼쳐진다는 이야기. 다만 <플래시>에서 이와 같은 패러독스를 다루는 방식은 생각보다 얄팍하다(물론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당장 앞서 말한 역설의 관계에서도 극히 터부시되는, 미래와 과거의 ‘나’가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도 가볍게 생까고(?) 넘어가는 수준이니.
다만 그 덕분에 주인공 배리 앨런 역 에즈라 밀러의 연기력은 더욱 돋보인다. 어쩌면 1인 2역을 이 정도로 준수하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에게 믿고 맡기기 위해 이렇게 시나리오를 구상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 실제로 영화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미래’의 배리와 ‘과거’의 배리가 한 공간에서 티격태격하는데 둘은 정말 완전히 다른 배우이자, 캐릭터인 것으로 느껴진다.

플래시라는 캐릭터는 이전에(영화 한정으로) <저스티스 리그>에 출연한 바 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같이 쟁쟁한 슈퍼히어로 틈바구니에서 뭔가 자리를 못 잡고 허둥대는 뉴비 같은 인상이었는데 솔직히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ㅋㅋㅋ 그렇지만 그 부분은 애초 배리 앨런이란 캐릭터 자체가 거의 집중력과 주의력 결핍에 가까운 증상을 갖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캐릭터 이야기를 더 해보면, 공식 포스터에서도 그렇고 예고편에서도 그렇고 마이클 키튼 옹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컴백한 배트맨(참고로 그가 출연했던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은 1989년작. 무려 30년도 훌쩍 넘은 옛날의 일이다)이 집중 조명되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 옛날보다도 더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 바로 그 자체가 ‘업계 대선배’에 대해 바치는 존경과 경의, 호사스런 대접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예우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본작을 통해 DCU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 슈퍼걸에 대해서도 한 마디. <플래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을 모아 전하는 바, ‘슈퍼걸은 단독 영화로 마땅히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칼-엘, 슈퍼맨이 없는 타임라인에 홀로 존재하게 된 카라 조-엘, 즉 슈퍼걸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력이 줄줄 흘러 넘친다. 다소 강인한 인상이면서 중성적 섹시함도 가진 사샤 카예는 라티노 여배우의 전형.

특별한 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인 만큼 스펙터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한다. 주인공 플래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저 빠른 속도로 달리기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원한다면 시간조차 넘나들 수 있는 존재다. 그런 능력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보여줄까? 얼핏 플래시가 일직선으로 거침없이 내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역시 직선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감독은 의외로 원형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마치 콜로세움을 연상시켰던 이미지는, 시간이란 선형적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순환하며 이어진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데 조금 과한 해석 같기도 하고.
어쨌든 서로 다른 시공간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비주얼의 구현에 있어선 독보적인 레퍼런스가 존재하는데, 공교롭게도 MCU 소속(?) 작품들이었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닥터 스트레인지 2: 대혼돈의 멀티버스> 등이다. 나름 엔딩에 가선 ‘놀랄 만한’ 비주얼과 스펙터클이 구현되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과감한 상상력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동일한 세계관 소속으로, 이전에 개봉했던 영화들의 주연배우들이 그대로 출연한다는 점에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비교하는 이야기도 많은데 역시 그에는 조금 미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일단 이 배우/캐릭터들이 힘을 합쳐 빌런에 맞서는 전투를 보자. <노 웨이 홈>의 경우 이전 영화들의 주연배우는 물론이고 빌런들까지도 소환되어 뉴욕을 배경으로 스케일 큰 규모의 전투가 펼쳐진다. 반면 <플래시>의 경우 소환된 빌런은 <맨 오브 스틸>의 조드 장군과 파오라 등. 그런 데다 조드 장군은 <맨 오브 스틸>에서 엄청났던 카리스마가 대폭 쪼그라들었다.
다른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카메오 형식으로 출연한다는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할 건덕지가 있다.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는 왔다갔다한 점이 있지만 <저스티스 리그>에 나왔던 배우들은 반가운 얼굴들로 여길 만하다. 주인공 플래시만큼 엄청난 비중으로 출연한 마이클 키튼의 배트맨도 그렇고. 그런데, 그 외에 (아주 잠깐)출연한 배우들이 다소 낯설게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하다못해 CW 드라마 버전의 플래시라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왜 안 나왔을까?

당위성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결말의 내용에 대해선 마땅히 지적해야 할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결말을 내면서도 어쨌든 플래시의 선택은 사실상 과거를 바꾼 것이다(!). 결국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아버지의 누명을 플래시가 벗겨준 것인데, 그렇다면 단순히 누명만 벗기고 마는 게 아니라 진범이 누구인지 알아내서 잡아버리면 될 일 아닌가? 다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엔딩이 애초의 구상과는 많이 달라졌다고도 하는데 복잡한 사정까진 모르겠으나 어쨌든 플래시의 마지막 선택이 의아한 것만은 사실.
불만을 많이 이야기한 듯하지만 실제로 <플래시>는 확실한 눈요기를 제공하는 슈퍼히어로 영화이긴 하다. 이른바 멀티버스를 다룬답시고 이전에 많고 많은 영화나 TV드라마들까지 일일이 섭렵해야 100% 이해되는 부분도 별로 없고, 특히 배트맨의 시원하고 화끈한 액션은 꽤 인상적이다. ‘재미있는 영화’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분명히 그렇다고 답할 만한 영화.
그럼에도 못내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이다. 본 글을 작성 중인 날짜 기준으로 <플래시>는 50만명을 조금 넘기는 관객을 동원했다. 문제는 개봉관 수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고 여름 시즌을 노린 기대작들이 이제 대거 개봉을 예정하고 있어 앞으로 관객이 더 들 것 같지도 않다는 점인데,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DCU의 전면 리부트를 앞둔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은, 빛보다 빠른 존재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래서 더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