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들어가며: <길복순>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이후, 작품 자체의 완성도나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작품 내에서 노출된 몇몇 요소로 인해 변성현 감독의 정치적 성향, 노골적으로 ‘일베’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무척 뜨겁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작품 외적인 이유로 작품까지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기는 한데, 본 글에서는 우선 작품 자체에 대해 논하면서 상기의 논란에 대해선 최소한의 수준만 언급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양립하기 힘든 두 가지 일은 뭘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양육) 일과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살인) 일이 아닐까 한다. 길복순(전도연)은 좌충우돌하면서 그 두 가지 일을 모두 한다. 중학생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자, 명실상부 글로벌 ‘살인청부’ 기업 MK의 에이스 킬러로 활약하는 중, 엄중한 규칙을 어기고 회사의 대표 차민규(설경구)가 지시한 미션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이에 MK에 소속된, 그리고 군소 살인청부 기업에 소속된 킬러들 모두의 타겟이 된다.
참 많은 ‘레퍼런스’들이 머릿속을 주루룩 훑고 지나간다. 전에 여기저기서 참 많이 봤던 이야기들이고, 그런 이야기들이 이전에 다른 콘텐츠에서 어떤 식으로든 다뤄졌다는 건 그만큼 관객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길복순>에서 그런 이야기의 요소들을 다룬 방식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은 총체적 난국이다. 이 흥미로운 요소들은 그저 설정으로서만 존재하고, 각각의 서사도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논하기엔 너무 얄팍하며, 결정적으로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이야기 덩어리’들이 너무 각각 따로 놀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이야기가 붙질 않는다.’
전체 이야기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자. <길복순>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이는 요소는 살인청부를 일종의 글로벌 비즈니스로 구체화한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이 부분의 독보적 레퍼런스는 누가 뭐래도 <존 윅> 시리즈일 텐데, 이처럼 현실에선 불가능하지만, 작품 내에선 일상인 세계관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1) 해당 세계관을 매우 촘촘하게 구성해서 핍진성을 확보하거나 2) 압도적인 비주얼로 찍어 누르며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사실 <존 윅> 시리즈 같은 경우 킬러들의 네트워크라는 세계관 자체가 완전 탄탄하게 구현되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고 있다는 느낌은 많이 들지 않는데, 그것은 시리즈가 억지로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늘어진 측면이 있다고 본다. 각설하고 <길복순>의 경우, MK라는 회사가 ‘동네상권’까지 싹쓸이를 하는(?) 한편, 많은 업계 종사자들이 누구나 몸 담고 싶어 하는 명실상부 글로벌 대기업으로 그려진다는 부분이 재미있긴 하지만 그냥 그 설정만 있고 뭔가 더 파생될 구석이 없다. 그 시각적 구현도, 솔직히 너무 오그라든다! 그런 점에선 오히려 10년 전에 나온 소지섭 주연의 <회사원>이 더 신박했다고 본다. 이 쪽이 더 ‘회사원’ 같았다고나 할까?
다음으로는 액션 시퀀스. <길복순>에서 가장 돋보이는 액션 장면은 허름한 술집에서 길복순과 MK의 차세대 에이스 한희성(구교환) 및 김영지(이연), 그리고 ‘군소 업체’ 킬러들이 서로 대결을 펼치는 부분인데, 솔직히 이 시퀀스의 연출은 매우 높은 확률로 액션감독이 도맡아 진행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작품 초반 야쿠자(황정민)와 길복순의 대결,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총격전 장면을 생각하면 그 모든 장면들을 감독 한 명이 연출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이기 때문이다.
※ 액션감독에 대하여: 많은 관객들에겐 ‘무술감독’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할 것이다. 상당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일반 관객의 예상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을 감독이 혼자서 연출하지는 않는다(물론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는 감독도 있다. 한국에선 대표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그렇다). 실제로 액션 장면이나 특수촬영이 들어가야 하는 장면에선 해당 분야에 오랜 노하우와 경력을 가진 감독이 사실상 콘티부터 시작해서 모든 장면을 연출하는데, 당연하지만 해당 부분에 대해선 전체 연출을 맡은 감독과 깊은 논의를 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이 바로 액션감독 출신이며 <존 윅> 시리즈로 입봉한 케이스.

사실 술집 액션 장면에서도 <킹스맨>이나 <나쁜 녀석들 2>에서 봤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앞서 이야기한 다른 액션 장면들에 비해 밀도의 차이가 너무 나서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초반 야쿠자와의 대결 씬,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총격전 씬, 그리고 마지막 길복순과 차민규의 액션 씬들을 보면, 기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액션을 정확히, 시원하게 보여줄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듯하다. 과장된 슬로모션, 실루엣으로만 처리하는 부분을 보면 이 감독은 액션 장면 연출에 자신이 없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
그리고 덧붙이는 이야기. <길복순>은 촬영 초기 전도연이 큰 부상을 당해 상당 기간 동안 촬영 자체가 지연됐다고 한다. 어차피 많은 장면에서 대역을 썼지만 그만큼 과감한 앵글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며, 설경구는 세간의 인상과는 달리 애초에 액션을 잘 하는 배우가 아니다. 그러니 액션 씬이 들쭉날쭉하게 느껴질 수밖에.
<길복순>에서, 앞서 언급한 술집 다중 격투씬 외에 또 좋았던 것은 당연히 전도연의 연기. 전체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중심을 잡아준 것은 여전한 전도연의 눈빛과 아우라였으니, 어수선한 액션 장면 외에 온전히 배우의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 부분에선 역시 ‘전직 칸의 여왕(?)’ 다운 모습이었다. 특히 딸이 엄마의 비밀(!)을 알았음을 고백했을 때, 그 ‘망설이며, 안도하며, 시치미를 뚝 떼는’ 눈빛은 진짜 끝내줬다! “엄만, 암말도 안 했다?” ㅋㅋㅋ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감독의 성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한 것이다. 글쎄, 변성현 감독이 ‘일베인지, 아닌지’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거나, 제3자인 내가 혼자서 추측하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건 몰라도 변성현 감독이 연출한 작품의 완성도나 성취, 적어도 관객의 호불호와는 완전 별개의 이슈로 자꾸 논란이 되는 건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란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괜찮다고 하는데 감독이 일베라 안 본다’는 말이라도 나오는 상황은(실제 이런 상황은 이미 벌어졌다) 감독 혼자서 책임질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덧붙인다.
만에 하나, 변성현 감독이 자초한 외부적 이슈 때문에 넷플릭스가 작품을 내리고 그 부분에 대해 감독에 대해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하면 어쩔 것인가? 감독의 성향에 관한 논란 때문에 투자를 못 받고 있다가 겨우겨우 투자를 받아 작품을 완성하고 극장에 걸었는데, 같은 이유로 불매 운동이라도 터져서 흥행에 막대한 악영향이 끼쳐진다면 그 영화에 오랜 기간 함께 했던 배우를 비롯한 다른 스태프, 제작사 직원들의 손해는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영화감독으로서 정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진짜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솔직히 지금까지의 변성현 감독 커리어로 봐선 그걸 작품 내에 고스란히 담아서 관객에게 전하는 일 자체가 무리이지 싶다. 그가 일베든, 아니든, 난 관심이 없다. 다만 영화에서 쓸데없는 구린내를 풍기는 행위는 감독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