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의 구원자(!), ‘K-콘텐츠’의 2023년을 여는 첫 주자라고 할 만한 <정이(JUNG_E)>가 지난 1월20일 공개되었다. 설 연휴 직전에 공개되자마자 보긴 했는데 어째 리뷰 업로드가 좀 늦어진 상황.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며 글을 시작해보자.
연상호 감독은 이제, 한국 영화계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중견’의 자리에 올랐다. 사실상 독립영화 수준이었던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를 거친 후 그에게 ‘천만 영화 감독’의 타이틀을 안긴 실사 영화 데뷔작 <부산행>, 그리고 부침이 심했던 <염력>과 <번도>에 이어 드라마 <지옥>까지, 활동한 기간에 비해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을 직접 연출한 그가 아니던가? 신인 감독이든 기성 감독이든, 한 작품을 몇 년간 ‘준비’만 하다 무산되고 마는 경우가 아직도 적지 않은 대한민국 콘텐츠 창작의 현실에서 어쩌면 참 신기하기까지(?) 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연상호 감독이 이처럼 숨쉴 틈도 없이 지속적으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동력에 대해선, 애니메이션 분야에 오랜 경력을 갖고 있고 연상호 감독과 작품에 관해 여러 차례 컨택을 한 경험도 있으며 같이 술도 마셨다(!)고 하는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 추측을 할 수 있는 바가 있긴 하다. 일단 그는 ‘손이 빠르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데, 그 속도가 무지하게 빠르다고. 실제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부산행>의 기획을 불과 하루 만에 써냈고, 대부분의 시나리오도 완전히 끝맺음을 하는 데에 2~3개월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어떤 형식이든 ‘글’을 써본 적이 있는 이라면 이건 정말 축복 받은 능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그의 작품 전반에서도 어렴풋이 볼 수 있는 부분인데, 상당한 ‘외골수’라고 한다(이 이야기를 전한 지인이 그와의 대화에서 그런 인식을 받았다고 말한 점을 밝힌다). 일단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기어코 관철시키고자 노력하는 타입이긴 한데, 또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필요 이상의 마찰을 일으키거나 하는 일은 의외로(?) 별로 없는 듯. 일례로 그가 연출하는 영화의 촬영 현장 대부분은 분위기가 매우 좋아서 여러 작품을 계속 같이 하는 출연진과 스태프도 많은 편.
오늘 <정이>의 리뷰를 하면서 유독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직접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한 연상호 감독 특유의 색깔(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이 작품 전반에 너무 짙게 묻어난 경우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바로 그 ‘특유의 색깔’이란 부분에 대해선 뒤에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로 한다.

전체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디스토피아의 미래다. 인류가 외계에 거주지를 만들어 나가게 되는데 그 거주지의 거주민들이 본토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내전이 발생하고, 그 내전의 와중에 한 영웅적인 군인이 전사를 하자 그 군인의 뇌를 복제해 최강의 안드로이드 용병 군대를 조직하기로 한다는 내용.
일단 이야기 자체부터가 이전에 많은 SF 작품들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어서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각적 구현 또한 ‘전에 어디서 꽤 많이 본’ 느낌이다. 그 레퍼런스가 된 듯한 작품들을 이 자리에서 굳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듯한데, <정이>는 그 익숙한 비주얼의 외피를 두르고서 전혀 의외(?)의 부분에 천착하는 바가 있으니, 그건 바로 모성애, 그리고 한국인 한정으로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효(孝)’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성애 같은 경우 다른 SF 작품에서 조명을 한 적이 없진 않다. 안드로이드가 의도적으로 모성애를 자극한다는 내용의 <마더 안드로이드>가 바로 그렇지만 솔직히 높은 평가를 내릴 만한 작품은 아니고. <에이리언 2>나 <터미네이터 2> 등에서도 절절한 모성애가 보여지긴 하지만 그 경우엔 아이를 물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발휘되는 강인한 정신력(혹은 물리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결이 살짝 다른 감은 있다.
<정이>에서 인류 최강의 전사 정이는 딸 서현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전사를 하는데, 그녀의 뇌 속에 남아서 다양하게 작동하는 데이터가 필요했던 기업으로선 그 데이터 가운데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부분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골몰한다. 마침(?) 길었던 내전도 끝나가는 상황이니 시간도 촉박하고.
최첨단 과학 기술로도 밝혀내지 못했던, 그 무엇보다 강력한 생의 원천이 바로 모성애였다는 부분에서 큰 감동을 받을 시청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또한, 끊임없이 여러 차례에 걸쳐 복제에 복제를 거듭한 안드로이드지만 결국 자신의 어머니인 ‘정이’가 몹쓸 대접을 받는 것을 차마 못 보는 서현에게서 발휘되는 ‘효’의 정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시청자가 역시 분명히 있긴 할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건 그와 같은 나름의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굳이 이렇게 흔해 빠진 장치와 요소들이 필요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까지 한 감독의 취향이 짙게 반영되었기 때문일 테고,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용이한 장르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시각적 측면에서나 드라마 구성 측면에서나 그 성취가 그다지 높아 보이진 않는다.
특히 앞서 이야기한 모성애니, 효니 하는 부분을 또 연상호 감독 특유(?)의 ‘신파조(調)’가 발휘된 걸로 본다면(개인적으론 이 의견에 100% 동의하지 않지만) 그 또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못할 것이고.
본작이 유작이 된 故 강수연 배우도 그렇고,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김현주, 강한 개성의 소유자 류경수 등등, 분명히 출중한 배우들이 출연했는데 디렉팅의 문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퍼포먼스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연구소장 상훈 역의 류경수 배우는… 밤에 이불 몇 번 찼을 것 같다.
인간의 뇌를 데이터화하는 것까지 성공한 시대에 고작(?) 서현의 폐암 정도도 치료하지 못하는 거나, 최강의 전사를 복제(하고 생산)하기 위해 이전에 전투를 경험한 전사의 뇌가 굳이 필요한지 등에서 고증(?)의 오류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으나 그 정도는 그냥 ‘사소한’ 문제라고 해두자. 어쩌면 <정이>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나름 SF 액션 장르를 표방한 영화 치고 전체적인 연출이 너무 평이하고 안일하며 제일 쉬운 길로만 간 듯한 모습이다.

정이의 전투가 펼쳐지는 오프닝이나 후반부 모노레일 안에서 안드로이드와 격투를 벌이는 장면 같이 도드라지는 씬이 없진 않으나 그 외엔 인상적인 장면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점에선 감독의 전작 <염력>이나 <반도>와 비교해도 여전히 아쉽다. 이것보단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정이>에서 정말 참신하다고 느꼈던 점은 사망자의 뇌 데이터가 경제적인 차원에서 다르게 가치가 매겨진다는 점이었다. 사망자(유가족)이 받게 되는 보상 액수에 따라 뇌 데이터를 얼만큼 ‘범용적’으로 활용할지 결정되는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서, 예컨대 (작품 내에서도 중간에 잠깐 나오는)이른바 ‘섹스봇’이 된(혹은 장차 그렇게 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는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딸의 모습을 그린다든지 했으면 훨씬 더 신박한 SF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도 하게 되었다. 연상호 감독은 직접 연출을 하기보단 기획이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제작 부분을 담당하거나 최근 여러 미드에서 그런 것처럼 콘텐츠 전체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역할을 맡는(물론 연상호 감독은 이전에 연출 대신 제작과 기획자 역할을 한 적이 있다)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연상호 감독이 꼭 귀담아 들어주길 바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에겐 팬도 많고, 안티도 많다. 그의 작품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비판하는 의견이 많은 것은, 그만큼 이전에 그가 보여줬던 일종의 ‘결기’에 매력을 느낀 사람이 많았고, 기대도 그만큼 많기 때문이란 것.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연상호 감독은 앞으로도 꾸준히(역할이야 어떻든) 현업에 종사하면서 여러 작품을 선보일 것이다. 모쪼록 더 멋진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