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막장 복수극이 더 없이 잘 어울리는 각자도생의 시대: [더 글로리]

2022년의 마지막 날 공개되어 연말 연초를 홀랑 날려먹게 만든 ㅠㅠ <더 글로리>

대부분의 문명 국가에서 ‘사적 구제’를 법으로 금지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바로 그 대부분의 문명 사회는 법치주의(혹은 죄형 법정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게 흔들리면 그 사회가 극도의 혼란으로 빠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런데, 사람들의 평범한 인식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일수록 재미는 더해진다. 우리가 홍길동이나 로빈 후드나 심지어 배트맨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 맛볼 수 있는 카타르시스라는 감정이 그만큼 각별하기 때문이다. 특히 배트맨 같은 경우(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어쨌든), 자경단원(Vigilante)으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며 완벽한 듯 보였던 슈퍼히어로에게 새로운 층위의 서사를 부여한 <다크 나이트>와 <더 배트맨>이 그래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국의 이른바 ‘안방극장’에서 스타 작가로 통하는 김은숙 작가의 신작 <더 글로리>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주인공이 어렸을 적 당한 ‘학폭’, 그리고 그에 대한 사적 구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다만 2022년 연말 공개된 ‘파트 1’은 전체 분량에서 채 절반도 진행이 되지 않은 느낌이다!). 어쨌든 작가가 그 이름을 알리는 데에 큰 공을 세운 <파리의 연인>이나 <태양의 후예>나 <도깨비> 같이 말랑말랑한(?) 로맨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드라마 내에서 대사와 표현의 수위가 전례 없이 높은 편이라 이렇게 생소한 느낌은 더하다).

사실 송혜교 배우의 얼굴을 TV에서 보는 건 꽤 오랜만이다

주인공이 과거에 자신이 입었던 피해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채로, 가해자들을 찾아내 복수를 가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척 재미있다’. 실제로 2022년 연말 넷플릭스에서 <더 글로리>의 공개 이후 많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쏟아진 반응은 “밤을 새우며 정주행했다”거나 “(파트 2가 공개되는)2023년 3월까지 어떻게 기다리냐”는 등, 뜨겁기 이를 데가 없다.

동은(송혜교)은 고등학교 시절 연진(임지연) 등으로부터 심한 폭력을 당한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동은은 내부로 침잠하는 대신 가해자들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고, 그것을 위해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며, 아주 꼼꼼하게 실행에 옮긴다. 사실 파트 1에선 이제 막 밑그림만 그린 수준이고, 이제 3월에 공개될 파트 2에서 더 쎈 상황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많은 시청자들이 <더 글로리> 파트 1에 열광한 것은 무엇보다 이야기 전개 자체가 정말 숨가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에 군더더기가 없고 박진감이 넘친다. 각 캐릭터들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사 또한 아주 담백하면서 적재적소를 찌른다(특히 설정상 색약인 재준을 비아냥거리면서 “넌 알록달록한 세상, 모르잖아?”라고 한 동은의 대사는 진짜 모골이 송연해지는 수준이었고, 그 외에도 상황에 따라 정말 기가 막히는 대사는 많이 나온다).

임지연(박연진 역) 등 ‘악역’ 조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드라마 자체에 대해선 이 정도로 정리하면 될 듯하고, 이제 3월에 파트 2가 새로 공개되면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그런데 파트 2 말고 ‘새 시즌’이 이어질 수도 있을 거라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바로 드라마에서 그려진 사적 구제라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

사실 드라마에서 복수극을 꿈꾸는 이는 주인공 동은만은 아니다. 다른 드라마 같았으면 주인공과 당연히 러브라인으로 이어졌을 법한 여정(이도현) 또한 복잡한 개인사가 그려지고, 어쨌든 둘은 명실상부 ‘한 배를 탄’ 사이가 된다(드라마 내에선 ‘칼춤 추는 망나니’란 대사가 직접적으로 나오고 실제로 여정은 ‘칼’을 손에 들고 휘두르는 직업-의사이기도 하다).

작년 3월에 있었던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세간에서 여러 촌평이 쏟아졌는데 그 중 아마도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이제부턴 각자도생의 시대’라는 말 아닐까 한다. 내 주변의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든 대열에서 낙오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관심 두지 말고 내 한 몸이나 건사하자는, 바로 그런 생각. 물론, 글의 맨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복수극이라는 소재는 매력적이고, 그런 이야기를 다룬 콘텐츠가 어제 오늘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이토록 하 수상한 시절의 일면을 드라마가 반영한 것 때문에 더욱 각광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못내 찜찜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 대한민국 대통령은 불과 며칠 전 사회 각 분야에서 이른바 경쟁의 원리가 도입되어야 한다면서 “교육도 경쟁시장의 구도가 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21세기 대한민국 공교육 현장에 경쟁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지 않은가? 오히려 세계 그 어느 나라의 경우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비인간적인 경쟁에 내몰리는 것이 우리 아이들 아니었나? 대한민국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이란 것을, 그 사람 하나만 모르고 있는 듯하다.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것만이 지고의 선이라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같은 반 친구의 주머니를 털고 고데기로 온몸을 지지다가 그게 들통나면 잘나신 부모의 빽을 동원하곤 하는 것. 자, 그 아이들을 ‘천천히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주인공의 다음 스텝을 우리는 오는 3월에 만날 수 있다.

이 숨가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될지, 3월에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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