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노 타임 투 다이, 팬데믹 시대에 제임스 본드가 세상을 구하는 방법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작 프랜차이즈,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여러 모로 아이러니한 존재다. 일단 설정상으론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정보기관 요원인 만큼 어디서든 본인의 정체를 숨기는 게 당연할 텐데, 누군가 이름을 물어보면 정말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본명을,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말한다.

본드, 제임스 본드.”

자신의 본명을 직접 밝히는 것만큼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결정짓는 방식이 또 있을까? 어쩌면 제임스 본드는 바로 그렇게, 매사 자신감에 가득 찬 태도 덕분에 60년이 넘도록 사지를 위태롭게 넘나들면서도, 얼굴은 다르지만 같은 이름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진작 완성은 되었으면서도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 때문에 1년이 넘도록 개봉이 미뤄지다 이제 우리 곁을 찾아온 신작 ‘007 노 타임 투 다이(이하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제임스 본드는 시리즈 역사상 가장 민망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야 한다. 바로 60년간(?) 자신의 직장이었던 MI6 정보국 본관에 들어가 자신의 상관이었던 M을 만나기 위해서!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힘들지만, 그 외에도 이번 ‘노 타임 투 다이’에선 이전까지 007 시리즈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상상은 했음직한, 그러면서도 그 어떤 시리즈에서도 나온 적이 없던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그런 점만 보고서 25번째의 이번 시리즈를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선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제임스 본드는 역시 수트빨!

‘노 타임 투 다이’를 본격적으로 ‘파기’ 위해선 무엇보다 전작인 ‘007 스펙터’를 언급해야 한다. 이 두 편은 등장인물도 그렇고 이야기도 연달아 이어지기 때문. 따지고 보면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된 첫 작품인 ‘007 카지노 로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최소한 전작인 ‘스펙터’의 내용은 알고 나서 본 작품을 봐야 한다는 정도는 이야기하고 싶다.

입이 딱 벌어지는 액션 장면이 휙휙 지나가면, 제임스 본드는 현역에서 은퇴를 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요건 스포일러라고 하긴 힘들 터다. 어차피 이 영화에서 대부분의 화끈한 액션을 담당하는 캐릭터는 ‘현역으로 복귀한’ 제임스 본드이니. 아, 아주 잠깐 아나 디 아르마스가 짧은 분량의 액션을 선보이는데 이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그러다가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힘든 여러 가지 이유로 본드는 현역으로 복귀를 하고, 전작의 악당이었던 오버하우저를 다시 만나고, 또 이야기는 이어지고, 액션도 이어지고…

‘노 타임 투 다이’에서 가장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어쩌면 초창기 시리즈들에서 가장 호평을 받았던 부분들이라고 하겠다. 바로 이국적인 배경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스턴트 액션. 이탈리아와 쿠바에서 제임스 본드는 아주 세련되고 정교하게 설계된 시퀀스를 거침없이 내달린다. 요즘은 대형 화면의 고화질 TV도 많이 보급되었고,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눕듯 앉아서 이것저것 마시고 집어먹기도 하면서(요즘 극장에선 음식물 섭취가 금지되어 있다) 영화를 보는 게 편하다곤 하지만, 확실히 영화관의 커다란 화면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스펙터클.

그리고 장엄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도 ‘노 타임 투 다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꼭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다. 지금까지 제임스 본드 역을 거쳐간 총 6명의 배우들 중, 기간으로 따져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지상 최강의 첩보요원 역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에 대해 바치는 헌사로 봐도 좋을 것이다.

‘노 타임 투 다이’에서, 신참 요원 팔로마 역의 아나 디 아르마스(오른쪽)는 짧고 굵은(?) 액션을 보여준다

반면 ‘노 타임 투 다이’에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러닝타임이 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앞서 언급한 엔딩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제임스 본드의 개인사를 더 깊게 파고들며 지루해진 구석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그리고 앞서 비교적 초창기에 속하는 시리즈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부분을 현대적으로 구현하면서 장점이 되었다고 했는데, 바로 그 초창기 시리즈들에서 상당히 나쁜 평가를 받았던 부분까지도 단점으로 답습을 하고 있다. 세상을 멸망시킬 야심을 품고 있는 악당의 기지는 경계가 왜 그리 허술하며, 악당의 수하들은 왜 제임스 본드가 째려보기만 해도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걸로 느껴질까? 본드가 살인 면허까지 갖고 있을 정도로 특수 훈련으로 단련된 인간 병기라고 해도 후반부의 총격전 장면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긴장감을 전혀 선사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악당 진영은 부하들만 문제가 아니라 두목도 심각한 문제다. 이 희대의 범죄자가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인 복수심의 발로라고 해도 무방하다. 매우 매력적으로 그려진, 다른 영화들의 다른 수많은 악당 캐릭터들이 바로 그런 이유를 갖고 있긴 했다. ‘노 타임 투 다이’의 악당 사핀의 문제점은 거기에 개연성이나 설득력이 전혀 부여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게다가 사핀 역을 맡은 라미 말렉한테 왜 감독들은 항상 입에 보철물을 끼워서 새는 발음을 하게 만드는지. 거슬리게시리(혹시 아니라면, 제보 바랍니다).

영화 속 이야기 전개에선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 알고 있어도 감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노 타임 투 다이’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 즉 악당 사핀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사용하려고 한 무기는 일종의 나노봇으로, 그저 신체적 접촉을 하기만 하면 특정한 DNA를 가진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이것으로 팬데믹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장엄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는 ‘노 타임 투 다이’

글쎄, 이미 007 시리즈 자체는 일견 허무맹랑한 듯하게 보이지만 나름 세상의 고민을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생각보다 많다. 대표적으로 냉전시대가 종식되며 절대악으로 상정되었던 동구권 진영의 첩보기관이 마약왕, 미디어 재벌, 거대 범죄 집단 등의 악당으로 대체된 것은 주지의 사실.

또 있다. 대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007 시리즈와 제임스 본드는 확실히 이전까지의 모습과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당시는 에이즈(AIDS)에 대한 국제사회의 경각심과 불안감이 극에 달했던 시절. 사람과 사람의 접촉, 특히 성적 접촉이야말로 에이즈의 전염 가능성이 가장 높아지는 요인이었는데 바로 이를 반영하여 제임스 본드는 여러 본드 걸들과의 문란한 성생활을 반성(?)했던 것. 게다가 이전의 수많은 시리즈들에서 그저 눈요기거리에 불과했던 여성 캐릭터들이 점차 주체적으로 일신하는 모습까지도 작품 속에 담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팬데믹이다. 신체적 접촉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비말을 통해 감염되는 치명적인 전염병 코로나가 창궐하는 시대, 제임스 본드는 이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선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온몸을 바쳐 웅변하고 있다! 60년을 이어온 시리즈 역사상, 가장 처절하게. 그리고 장엄하게.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진 것처럼, 007 시리즈는 이제 ‘새로운 본드’를 영입해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새로운 캐스팅에 대해 약간의 잡음이 발생하고, 그러면서도 본드는 유려하게 사선을 넘나들고, 세상사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담고, 작품마다 크고 작은 부침을 겪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영화 역사상 가장 크게 성공한 이 연작 프랜차이즈는 언제나 우리 곁을 찾아오고, 많은 선택을 받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흔들지 않고 저은’ 마티니를 한 잔 마셔볼까 한다.

제임스 본드여,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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