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매거진 63회차 업데이트에 올라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글을 작성하고 있는 현재, 모처럼 눈이 내리고 있다. 올 겨울 들어 첫 눈은 아니지만 심상치 않은 기세로 펑펑 내리는 눈은 저녁이면 제법 쌓여서 퇴근길에도 꽤 지장을 줄 듯한데, 이럴 때 생각나는 작품이 한 편 있어서 책장에서 꺼내 다시 한 번 펴봤다. 그 제목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작품 마지막 부분 정도에 가서 눈이 많이 내리는 장면이 나왔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확인을 해보니 내 기억이 틀리진 않았다.
작가는 박민규. 데뷔작인 <지구영웅전설>과, 같은 해 나온 그의 대표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작품에 관해선 논란이 있다. 그에 대해선 뒤에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등이 큰 관심을 받았고, 본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팬덤은 물론이고 캐주얼한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모았다. 혹자(라고 쓰고 지인 중 하나인 ‘여사친’이라고 읽는다)는 “아저씨들의 판타지”란 이야기도 하는데, 중년 아재의 향수를 자극하는 구석이 확실히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수십 년간 이어진 ‘지고지순하기 짝이 없는’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남주와 여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사귀기도 하고, 중간에 잠시 헤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 엔딩에 대해선 스포일러가 되니 여기까지만. 사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독특한 구석이 많은 게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인데, 바로 그 독특한 구석의 대부분은 작가 박민규의 강한 개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여주인공은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못생겼다는 설정이다. 하필이면 로맨스의 여주인공이 추녀라니. 이 부분을 보고는 뭔가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문제제기라고까지 하기엔, 글쎄. 그보단 흥미로운 상황 설정 정도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반면 남주인공은 ‘은근히’ 훈남이란 설정이 있는 듯한데, 두 주인공이 만나는 공간적 배경인 백화점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남자 직원 인기투표를 했을 때 1위가 바로 남주인공. 혹시 위와 같은 내용만 보고 뭔가 시대착오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그 느낌은 당연하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 초반.
어쨌든 남주가 정말 순간적인 호기심(?) 때문에 여주에게 끌린 건 아니다(그러고 보니 본 작품에선 남주인공, 여주인공 모두 이름이 나오질 않는다). 여주는 필경 그 못생긴 외모 때문이겠지만, 백화점 내의 여직원들 중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고 있는 듯 없는 듯 하루하루를 보내는 존재. 그런 그녀에게 남주가 무심결에(!) “우리, 친구할래요?”라고 말을 걸었을 때조차 대답조차 않고 그저 자리를 피하고 만다.
그러다가 결국 주변의 도움으로 둘은 연애를 시작하는데, 둘 사이는 자주 삐걱거린다. 여주는(필경 그 외모 때문이겠지만) 스무 살 넘게 살아오면서 그 누구한테도 자신에게 살갑게 대한 적이 없고(심지어 그 부모마저도) 누군가로부터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 남주 또한 남주대로 어렸을 적 친부로부터 버림을 받고 억척스런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사실 여주와 비슷하게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거나 애틋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 사이의 연애란 서걱거릴 수밖에 없는 노릇. 가끔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요한(요한은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다.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세상 달관한 듯한 분위기는 마치 <데미안>의 데미안을 연상시킨다)의 지원사격도 받고 하면서 어렵사리 관계를 이어 나간다. 그리고, 예정된 결말.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나름 베스트셀러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팔리기도 했으니 궁금하신 분은 직접 구해서 보시길 바란다. 책 표지엔 그 유명한 그림, 디에고 벨라스케즈의 <시녀들> 중 ‘일부’가 들어가 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른바 ‘스페셜 에디션’의 표지는 조금 심심하게 바뀌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이라면 말미에 ‘라이터스 컷’이라고, 추가된 엔딩(?) 부분이 있다는 것. 영화에서 극장 개봉판과는 다른 엔딩을 감독이 원하는 대로 편집하여 넣은 ‘디렉터스 컷’에 비견할 만한 부분으로, 남주와 여주, 그리고 요한의 시각에서 본편의 엔딩과 다른 각각의 엔딩이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박민규 작가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본 독자의 입장에서 다소 안타까운 논란에 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출간 당시 일부 표절 의혹이 있었으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작가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작품 전체가 그렇단 이야기는 아니고, 한국프로야구 첫 세대 구단인 삼미슈퍼스타즈에 대해 인터넷(PC통신)에 올라온 글을 작품 속에 사실상 거의 그대로 전재했다는 점을 작가가 인정한 것인데 어쨌든 개운치 않은 입맛을 남겼다.
아주 가끔은, 가슴 시리고 절절한 이야기에 젖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다시 보기에 딱 좋은 작품이 바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고 생각한다. 특히 요즘 들어 매사 심드렁한 아재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당신이 가장 설레었던 시절은 언제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