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상실, 그 사이쯤의 어딘가: [은하철도의 밤]

미야자와 겐지 作, <은하철도의 밤>

밤하늘에 길게 늘어선 희뿌연 별들의 길. 우리가 ‘은하수’라고 부르는 그 길을, 기차를 타고서 여행을 하듯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풍부한 상상력이야말로 문화 콘텐츠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원천이라고 한다면, 이토록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1백년이나 이전(!)에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니! 그런데 웬걸, 낭만과 희망이 넘칠 것만 같은 이 여행길의 마지막엔 뜻밖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자세히 하기로 한다.

일본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1933년작 단편 <은하철도의 밤>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하늘을 두둥실 나는 기차를 타고 은하수를 여행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그것은 주인공 소년인 조반니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그의 곁에는 착하고 사려 깊은 마음씨의 단짝 친구 캄파넬라가 있다.

※ 원작 소설에서 캄파넬라가 딱히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으며, 다만 작품 내에서의 말투나 행동거지 등으로 소녀가 아닐까 추정만 할 수 있다. 작품을 읽을 때는 당연히 소녀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리뷰를 작성하려고 관련 자료를 좀 검색해보니 캄파넬라의 성별이 모호한 지점이 의외의 재미 포인트(?)로 작용하는 듯. 덧붙이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의 창작 뮤지컬이 작년에 초연 무대에 올랐는데 여기선 캄파넬라가 남성으로 나온다. 뮤지컬을 소비하는 주력 관객이 여성이란 점을 염두에 둔 구성으로 보이는데, 솔직히 너무 BL물 같아 보인다;;;

등장인물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공간적 배경은, 당연히 일본이 아닌 유럽 대륙에 위치한 어느 국가(원작에서 명확하게 나오진 않는다). 시간적 배경 또한 모호한데,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은하수’에 대해 배우는 열 살 남짓한 어린이가 공장에서 노동을 한다는 내용이 나오는 걸로 보면 대략 산업혁명 시기를 전후로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장르 자체가 판타지니 시공간적 배경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반니와 캄파넬라, 그리고 조반니를 못살게 굴고 싶어 안달이 난 자넬리 등이 사는 마을에선 정기적으로 은하수 축제가 열려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은하수를 보곤 한다. 캄파넬라가 조반니에게 축제에 같이 가자고 하기도 했고, 조반니 스스로도 축제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몸이 불편한 어머니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중, 조반니가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캄파넬라와 함께 하늘을 나는 기차를 타고 ‘은하정류장’을 막 지난 상황. 그러면서 둘은 십자성도 지나고, ‘백조 구역’도 지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조반니가 다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향 마을. 강가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보고는 뛰어가보니 반 친구 하나가 ‘캄파넬라가 강에 빠진 자넬리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물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은하를 가득 머금은’ 강가에서 만난 캄파넬라의 아버지가 조반니에게 알은체를 하며 작품이 끝난다.

<은하철도의 밤>은 그림책으로도 나와 있다

본 글에서 자세히 적지는 않았지만 조반니와 캄파넬라가 은하철도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예컨대 새를 잡는 사람이라든가 검은 옷을 입고서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든가 등대지기라든가 하는 사람들이 나름 상징하는 바가 없지 않을 걸로 보이긴 하는데, 또 돌이켜보면 이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작품 자체가 판타지스러운 동화이다 보니 굳이 또 ‘파고 들어갈’ 것까진 없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 작품에서 눈 여겨 볼 만한 지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동 노동의 현실을 조명한 부분이라든가 의외의 비극적 결말 같은 부분이라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성향 탓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은하철도의 밤> 외에도 그의 다른 작품 <주문이 많은 요리점>이나 <첼로 켜는 고슈>(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다) 같은 작품을 보면 아이가 꾸는 순진무구한 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은근히 기묘하면서 으스스한 느낌도 풍긴다. 참고로 작가는 불과 서른 여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은하철도’ 까지 나오면, 역시나 <은하철도 999>

<은하철도의 밤> 이야기를 하면서, 이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완성된 또 다른 유명 작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은하철도 999>. 잠깐 살펴본 내용을 봐도, 기차를 타고 우주를 여행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 지지고 볶는다는 줄거리가 완전히 같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엄마를 끔찍이 생각하는 어린 소년(한국판에선 ‘철이’, 원작에선 ‘테츠로’)이 기나긴 여행을 거치며 한 단계 성장한다는 테마 자체도 마찬가지로 동일.

다만 <은하철도 999>는 애니메이션(원작 만화도 있는데, 만화판과 애니판은 엔딩이 다르다)으로 제작된 탓에 아예 SF 장르가 되었고, 배경은 미래가 되었으며, 원작이 된 단편 소설보다 훨씬 다양하고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농후한 매운 맛(매운 맛이 지나쳐 성인 취향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 여기서 ‘성인 취향’이라는 건 단순히 선정적인 장면-물론 그런 장면도 나오지만-이라기보단 전체적인 테이스트가 ‘어린이가 완전히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점이란 걸 말한다)을 자랑한다.

<은하철도의 밤>을 보고서, 역시 이 작품이 모티브가 된 작품 <은하철도 999> 생각이 나서 유튜브에서 검색을 해보니 그 옛날 내가 어린 시절에 듣기에도 어딘지 모르게 참 구슬펐던 주제가를 매우 진지하게 부른 김국환 아재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뭔가… 마음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다.

지금 <은하철도 999>를 다시 보고 싶은 분은 ‘왓챠’로 달려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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