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인상적인 경험

<헤어질 결심>의 관람은,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경험이다

여기, 참 번듯한 경찰이 한 명 있다. 무엇보다 업무에 충실하고, 피의자 취조 과정에서 폭력행위 같은 것도 용납하지 않는데다 험한 일을 하면서 항상 넥타이까지 메고 다니는 사람. 그런 그가 한 미망인을 만나고, 이내 사랑에 빠지고,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이 붕괴되기에 이른다.

팜 파탈이 등장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느와르 작품들 중 다수는 사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맺어질 수는 없는 운명의 남녀가 기어코 서로를 향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그 과정은 지난하면서 동시에 흥미롭다. 한국어가 서툰 미망인이 스마트폰 번역기를 통해 털어놓는 내심이 남자에게 다가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묘한 지체는 긴장감이 된다. 캐릭터가 들어설 수 없는 공간에 굳이 그 캐릭터를 들여놓는 감독의 잔망스러움은 넉넉한 여유가 된다. 눈빛과 표정 그 자체로 씬을 완성시키는 배우들의 연기는 미결로써 완성되는 이 희한한 이야기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에선 대사들도 꽤 공들여 정제된 느낌이다. “상대가 결혼을 하면, 그 사랑이 끝납니까?”라는 대사는 도발적이고,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대사는 모두 캐릭터의 진심을 전달하며,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라는 대사는 그대로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만하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캐릭터의 진심을 전하는 대사

영화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그리고 그 구분은 각 장(章)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크게 연관이 있다. 1부의 배경은 부산. 부산은 항구도시란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부산은 산지 지형에 위치하고 있어 수직으로 올라가거나 떨어지는 이미지를 구현하기에 좋은 동네다(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떨어진다).

2부의 배경은 이포. 원전이 들어서있는 가상의 도시 이포는 바다와 안개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 바다는 수직운동과는 정반대로 수평운동(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곳이고, 여기에 안개라는 장치까지 동원이 되니 이 상징과 은유를 한 꺼풀씩 벗겨보고 싶은 충동이 더 심해진다.

한편,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거의)항상 18금의 수위를 유지했던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에서 갑자기 얌전(?)해진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일단 이 작품은 감독이 항상 관심을 가졌던 복수극도, 치정극도 아니고 그저 찐한 멜로드라마란 점이 가장 큰 이유가 될 테고, 감독이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농담처럼 이야기한 “흥행감독이 되고픈” 바람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생각해보면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와 <올드보이> 정도를 제외하고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본 적이 없다). 어쨌든 굳이 그렇게까지(18금의 수위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을 테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담백한(?) 영화를 만나게 되었다.

탕웨이의 매력은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아, 박해일을 비롯한 다른 모든 배우들도.

그리고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 또 다른 점이 있는데, 바로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영혼의 파트너 정정훈 촬영감독이 아닌 다른 이(이전에 김지운 감독과 작업을 많이 했다는 김지용 촬영감독)와의 작업이란 것. 물론 정정훈 촬영감독은 진작 할리우드의 콜을 받고서 <스타워즈>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던 와중이라 스케줄이 안 맞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번엔 박찬욱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스타일을 일부러 버리기 위해(버린다기보단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만든다.

그도 그럴 것이 박찬욱 감독은 전작인 <아가씨>를 비롯하여 <올드보이>와 <박쥐> 같은 작품들에서 정말 변태적(…)일 정도로 미장센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번 ‘헤어질 결심’에선 상대적으로 좀 넉넉한 카메라 앵글과 샷을 보여준 듯하다(물론 이 작품에도 몇몇 ‘변태적’인 앵글이 존재하긴 한다. 취조실 장면이라든가, 빈번한 플래쉬백이라든가, 캐릭터의 얼굴 일부를 가리는 구도라든가). 어쨌든 참 뻔한 이야기(그런데 안 그런 멜로드라마는 세상에 없지 않은가?)를 남다르게 하는 재능의 소유자, 박찬욱 감독에게 탄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배우들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헤어질 결심>에 출연하는 모든 주조연 배우들은 본인들이 프레임에 등장하는 이유를 타당하게 설명한다. 당연히, 연기로. 그러고 보면 이 작품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은 박찬욱 감독과 처음 작업을 하는 배우들이라고 한다. 정말 여러 가지 부분에서 준비를 많이 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마침내’ 만나게 된, 이 인상적인 경험. 요즘 시즌이 시즌인 만큼 블록버스터급 텐트폴 영화들이 이미 개봉을 했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와중, 더 많은 이들이 꼭 느껴볼 만한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꼭!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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