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이야 넷플릭스가 주가도 많이 빠지고 이렇다 할 성장 모멘텀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과감한 투자를 바탕으로 한껏 덩치를 키우기도 했다. 바로 그 때만 해도 넷플릭스는 자신들이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관건이 오리지널 콘텐츠에 있다고 판단한 모양인데, 그 판단이 맞았건 틀렸건 간에 지난 기간 동안 주로 오리지널 콘텐츠에 대해 넷플릭스가 적지 않은 투자를 한 것만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엔 물론 ‘오징어게임’이나 ‘브리저튼’ 같이 처음부터 오리지널 콘텐츠로 시작해서 큰 성공을 거둔 작품도 있는데, 그와는 달리 이미 타 채널을 통해서 공개가 된 작품을 (계약을 통해)’냉큼 채와서’ 넷플릭스 자체에서 공개를 한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현재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가 있지만 자체 제작을 한 경우는 아니어서 ‘오리지널 콘텐츠’라고 하긴 힘들지만, 어쨌든 오리지널은 오리지널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브레이킹 배드’ 시리즈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미국 케이블 채널인 AMC에서 최초 방영했다가 큰 인기를 얻은 이후 계약을 통해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공개된 경우가 바로 ‘브레이킹 배드’. 그리고 스핀오프 시리즈인 ‘베터 콜 사울’은 아예 넷플릭스가 제작까지 도맡아서 역시 자체 공개가 되었다.

한편 미국 말고 외국의 드라마 시리즈 가운데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스페인의 한 지상파 채널에서 최초 방영된 드라마 ‘종이의 집(La Casa de Papel)’이 바로 그것.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모여서 작당을 하고 엄청난 강도행각을 벌인다는 내용의 이 드라마는, 그 흥미로운 내용 덕분에 큰 인기를 얻었고 이후 넷플릭스가 재빠르게 계약을 맺고 판권까지 확보하면서 자체 공개는 물론, 이후 마지막 시즌에 이르러선 자체 제작에도 나섰다.
오늘 보리스 매거진의 취향 코너에서 살펴볼 드라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은 앞서 언급한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의 리메이크 버전이다. 해당 작품의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을 보고서 느낀, 다소 아쉬운 몇 가지 부분들은 어쩌면 이 드라마가 처음부터 개발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리메이크’이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더 자세하게 하기로 한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에서 원작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단 시대적 배경이 한반도 통일을 목전에 둔 근미래가 되었고 이를 기념하며 판문점 인근에 세워진 조폐국(오랜 기간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온 두 집단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로 합치려면 우선 경제적 공동체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이 조폐국에서 제작되는 지폐는 당연히 한반도 통일정부 하에서 사용될 지폐다)을 강도들이 터는 내용이 된다는 것. 참고로 스페인 드라마였던 원작은 당연히 스페인 조폐국을 터는 내용이다(1, 2시즌의 경우).
어쩌면 한국판의 이 배경 자체가 꽤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남한과 북한이 바야흐로 통일을 앞두고서 겪을 수밖에 없는, 다소 혼란한 사회상의 조명에 대한 기대였다. 오랜 기간 서로 적대하면서 지내온 두 진영이 갑자기 하나가 된다고 했을 때, 반대로 오랜 기간 하나의 정체성으로 살아온 집단이 갑자기 둘로 갈라진다고 했을 때 각각 겪게 되는 카오스에 대해 우리 모두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기대는 그저 기대에 그쳤다. 작품 내내 인질극이 벌어지는 조폐국 밖의 다양한 상황을 조명하는 일에 작가와 연출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인질극, 강도단 내부의 갈등, 자세히 밝히기는 곤란한 몇몇 캐릭터의 상황,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하루 속히 이 인질극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경찰 대응팀의 압박감 정도가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이 오롯이 집중하고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뭐, 그게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는데,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그저 판타지로만 보인다는 게 문제다. 작품의 세계관이나, 사건이나, 상황이나, 캐릭터들이나, 갈등의 요소들이 최소한의 개연성을 확보하고 시청자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인질극이 벌어졌는데 현장 총책임자가 거리낌없이 퇴근(!)을 하는가 하면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몰래 무력진압을 시도하는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이 말이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잠시 모인 범죄자들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적어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일부러 가명으로 부르게 하는 것까진 좋은데 아들은 왜 자꾸 아빠를 찾으며, 많은 인질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인질범 무리의 두목에게선 굳은 신념 대신 극도의 나르시시즘만 보인다.
어쨌든 이 소동극은 시청자에게 긴장감도, 두근거림도 선사하질 못하고 그저 판타스틱한(?) 볼거리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5.56mm 탄알 하나도 밀거래로 구하기가 힘든 한반도의 상황에서 군용소총으로 무장을 한 범죄자들에게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인질범과 로맨스에 빠지는 인질에게도, 업무 능력은 최고지만 연인 앞에선 사랑꾼 이상도 이하도 아닌 헙상가에게도 감정이입이 되질 않는 것이다.

시놉시스만 보면 아주 흥미롭고 리얼한 범죄 스릴러인 것만 같은 이야기였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판타지라니!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지자, 나는 혹시 이 드라마가 리메이크인 점이 그 원인이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되었다. 고백하자면 원작을 보진 않았는데, 관련 내용을 좀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원작도 바로 비슷한 지점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는 식의 이야기를 볼 수가 있었다. 옳거니, 바로 그거구나.
차라리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매우 리얼한 한편으로 여러 갈등 요소가 극단으로 치닫는 ‘히트’나 ‘타운’ 같은 영화의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되면 또 ‘이게 무슨 리메이크? 원작하곤 완전히 다르잖아’라는 의견이 나올 게 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도 힘들었을 터. 이것저것 따져보니 결국 지금의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거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지금의 리뷰를 작성하며 다시 확인을 해보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은 공개 첫 주 글로벌 순위에서 3위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6월 말 기준으로 비 영어권 TV쇼 부문에선 1위를 차지했고(이 부문 8위가 한국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이다) 스타팅 성적이 나쁘진 않은 편이다. 어차피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는 도중 시즌 1이 끝나기도 했고 앞으로도 몇 시즌이 더 나오긴 할 텐데, 호불호를 탈 수밖에 없는 현재의 노선을 앞으로도 견지할 것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