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사람이 있다. 실제론 한 번 만난 적도 없으면서 괜히 잘 아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사람. 그냥 얼굴을 자주 봐서 익숙한 게 아니라 실제 이웃 같고 친구 같기도 한, 그러니까 참 가깝게 느껴졌던 사람. 대중적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연예인 중에 나한테 그런 느낌을 주었던 이 중 안성기 배우가 있다.
안성기 배우가 지난 1월5일 영면에 들었다. 향년 74세. 참 서글서글하고 편한 인상만큼이나 실제 인성과 마음 씀씀이도 푸근했던 그이기에, 유가족은 물론이고 평생을 바치며 함께했던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특히 슬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기나긴 필모나 생애에 대해 지금 이 글에서 굳이 다시 살펴볼 필요는 없고, 그가 출연했던 작품들(많이 보진 못했다) 중에 유독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위주로 기억을 돌이켜보고자 한다.

<칠수와 만수>
그의 출연작 중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봤을 때 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원래는 연극으로 유명했던(연극에서 안성기 배우의 캐릭터인 박만수 역으로 또 유명했던 배우가 바로 문성근이다) 이 영화를, 난 독일어 자막이 붙어있는(?) 버전을 봤던 것도 참 특이하다면 특이한 기억. 당시 독일문화원에서 영화가 상영한다는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 하여튼 전철 타고 내려서 버스 타고 한참을 가서 남산 밑에 있는 괴테 인스티튜트(독일 문화원의 본명)에 가서 봤다.
본작에서 처음 안성기 배우와 콤비를 이뤘던 박중훈 배우가 이번 부고를 듣고 누구보다 가슴이 아팠을 것 같다. 아무튼, 일개 무지렁이 ‘노가다’가 세상을 향해 온갖 화풀이를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이젠 뭐 스포일러도 아니겠지) 엔딩이 참 먹먹했다.
<개그맨>
본작으로 장편 데뷔한 이명세 감독의 테이스트가 많이 느껴지는 영화이긴 하지만, 곰곰이 돌이켜보면 안성기 배우는 코미디 장르에서 진가를 발휘한 적이 많다. 이른바 ‘밤무대’에 서는 삼류 개그맨(안성기 분)이 어쩌다 얻게 된 총 한 자루로, 뜻한 바 있어(…) 은행을 털러 다니는 이야기. 워낙 유명하고 재평가도 필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직 안 본 이들이 많을 것 같아 엔딩은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앞서 안성기 배우가 코미디 장르에서 활약한 적이 많다고 했는데 사실 그 시초가 된 작품이 바로 본작이기도 하다. 연기 연습을 빙자(?)한 독백 장면과 때론 슬랩스틱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팔팔했던 시절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아! 여기에 배창호 감독이 연기자로 데뷔하기도 했다. ㅋㅋㅋ
<하얀 전쟁>
3년 전, 안정효 작가의 부고를 전하면서 쓴 글(링크)에서도 <하얀 전쟁>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참 인상적이었고 기억에도 진하게 남아있는 작품인데 그렇게까지 많이 알려지진 않은 듯해서(당시 제작비가 워낙 많이 들었는데 흥행에서도 크게 재미를 보진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다시 한번 언급하기로 한다.
본작은 당연히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개인은 피폐하게 망가지고, 여기에 모순되고 왜곡된 사회 구조까지 더해져서 큰 비극이 빚어진다. 여기서 이경영 배우도 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기억이. 아무튼 마지막에 이 비극을 끝내기 위해 총을 당기는 안성기 배우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영원한 제국>
정조 역으로 유명한 배우는 많고, 그만큼 많이 조명된 역사 속 실존 인물이기에 ‘국민 배우’ 안성기에게도 배역이 주어졌다. 사실 본작에선 정조 외에 심환지 역을 맡은 최종원 배우가 더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긴 했지.
본작엔 정말 인상적인 명장면이 나온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한 한 정자에서 ‘발’(‘수렴청정’ 할 때의 그 발)을 사이에 두고 정조와 심환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그냥 대화라고만 하니 심심한 장면일 것 같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듯 정말 긴장감이 넘치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둘 사이를 단순하게 놓고 보면 개혁파라고 할 만한 정조와, 보수파라고 할 만한 심환지 대감이 서로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그야말로 ‘칼로 싸우듯 치고 받는’ 장면에서 안성기 배우의 호흡이 단연 빛났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국영화 역사에서 기념비적으로 남은 본작을 시사회에서 보고 나오면서 ‘진짜 대박 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어느 하나 버릴 장면이 없는 본작에서 안성기 배우는 필모에서 몇 안 되는 악역으로 출연했다. 역시 한국영화 역사상 기념비적으로 남은 캐릭터, 우형사 역 박중훈 배우와 또 다시 결성된 콤비. 그 유명한 엔딩의 빗속 결투 장면은 이후 국내외의 수많은 창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역시 개인적으로도 무척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 쓰고 보니 다시 보고 싶네.
<라디오스타>
안성기 배우의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하나만 꼽으라면, 오랜 고민 끝에 본작을 꼽으려고 한다. 한 물 간 가수(박중훈)의 매니저로 나온 안성기 배우가 굉장히 바쁘게(…) 뛰어다녔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고, 특히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가 흐르는 마지막 부분의 장면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빙긋 웃음을 지을 만하다. 왜냐하면 바로 안성기와 조용필은 중학교 동창이기 때문(실제로 둘은 바로 옆자리에 앉은 짝궁이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번 안성기 배우의 부고 소식을 듣고 가왕 조용필 또한 빈소를 찾아 조문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 안성기 배우만큼 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훌륭한 연기를 선보일 배우가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성기 배우가 평생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한 훈훈함, 푸근함, 정겨움, 그리고 다양한 봉사와 사회활동을 통해 보여준 선한 영향력을 새길 만한 이가 과연 또 나올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을 듯하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