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맞은 휴무일. 집 거실 소파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잠깐 깬 직후, 어김없이 TV 리모컨을 손에 쥐고 채널을 돌리면 꽤 자주 만나게 되는 광고가 있다. “올해 열두 살인 땡땡이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중략) 후원 문의 XXXX-XXXX”. 자선을 위한 기부, 혹은 후원 등을 알리는 광고. 이런 광고는 공중파/케이블 채널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인터넷(주로 소셜 미디어, 혹은 유튜브 등)에서도 은근히 자주 나온다.
다들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아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그늘진 곳이 있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 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고, 대저 21세기에 선진국이라 하면 그래도 많은(‘모든’이라고 하진 못하겠다) 이들이 끼니 걱정은 하지 않는 나라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기부나 후원 등의 광고를 볼 때마다 다소 희한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광고에 메인 모델(?)로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여자 아이들이란 것. 나이는 비교적 다양해서 대략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정도까지 되는 아이들이 나오는데 아무튼 대부분은 어렵게 살고 있는 여자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남자 아이가 출연하는 광고도 보긴 했는데 비율상 훨씬 적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첫 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이유로는 ‘광고(자체)를 이루는 요소’에 대한 것일 게다. 성공하는 광고의 세 가지 요소를 ‘3B’라고 하는 건 업계에선 아주 기초적인 상식. 그러니까 알파벳 ‘B’로 시작하는 세 가지 대상, Baby(아기), Beauty(미녀), 그리고 Beast(동물) 중 하나 이상이 들어가는 광고가 성공한다는 속설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은 광고 프로모션 중 상당수는 아기나, 미녀나, 혹은 동물 중 하나가 들어갔거나 아니면 그들 중 둘 이상이 들어간 경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앞서 언급한 소위 기부/후원 광고들에 ‘여성 + 아이’들이 왜 그토록 많이 나오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아무래도 남자 아이보다는 여자 아이가 더 큰 보호 본능을 자아내지 않는가? 게다가 기부/후원 광고는 소비자가 특정 브랜드의 제품을 소비하여 자신에게 실질적인 이득(혹은 쾌락)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자기 만족을 위한 것. 그런 점에서 감성을 자극하는 일에 조금 더 용이한 여자 아이들이 나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덧붙여서 실제 여자 아이들이 남자 아이들에 비해 더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안타깝지만 엄연한 현실도 있기에 이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제3세계 국가 일부에서 횡행하는 조혼 풍습이나, 성폭력의 위험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점, 그리고 그로 인한 교육 기회 단절 등은 아무래도 남자 아이들보단 여자 아이들에게 특별히 더 위험한 상황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으론 이처럼 여자 아이들이 출연하는 광고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는 지적도 일각에선 제기되고 있다. 일단 성 역할의 고정이라는 문제. 빈곤, 그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사회적 기회의 박탈이란 점은 특별히 여자 아이에게만 더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 아이에게도 어렵긴 마찬가지지. 오히려 이런 점이 그릇된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와 같은 가난함을 ‘전시’하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하는 이른바 ‘빈곤 포르노’를 지양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실제로 다수의 기부/후원 광고에 출연하는 여자 아이들은 대부분 대역이고, 연기자이기도 하다. 물론 실제 대상자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이기 때문에 초상권과 사생활 침해의 문제가 있어 이런 광고에 직접 출연하는 일은 없지만, 지면과 영상에서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는 ‘생리대 하나 사는 것조차 어려운 여고생 XX이’는 분명 따로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서 빈곤 아동이라는 문제가 발생한 구조적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고, 사회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마땅한 일이지 그저 몇몇 개인의 일회성/선심성 시혜로 풀 일은 아니라는 점도 전하고 싶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푹푹 찌는 날씨 속 단칸방에서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쫓는 이도 있고, 뙤약볕 아래 폐지를 주우러 나서는 이도 있으며, 학교 대신 일터에 나가 동생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이도 있다. 우리, 돌아보자. 더 멀리, 더 넓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