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거시 미디어의 종말을 지켜보다

현직 대통령이 내란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아마도 세계에서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대통령을 선거로 선출하는 모든 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그런 와중, 이런 중차대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기성 언론이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

최근 여러 매체에선 다양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현재 지지하는 정당, 혹은 (만약 조기 대선이 이루어진다면)투표하고 싶은 후보 등, 그 항목은 나름 다양하다. 딱히 선거 시즌이 아니어도 뉴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내용. 그런데 며칠 전 별 생각 없이 KBS 뉴스를 보다가 그만 아연하게 만드는 여론조사 결과를 볼 수 있었으니…

“우리나라가 핵을 보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10명 중 7명이 찬성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어이없는 항목 전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제 북한은 핵 보유국”)이 있었고 그에 따라 “만약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핵 보유국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면”이란 전제가 깔리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대한민국의 핵무기 보유 여부가 시민 여론으로 정할 수 있는 일이 되나? 백 번, 천 번을 양보해서 단순히 시민들의 의견일 뿐이라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위험한 질문이 아무렇지도 않게 조사 항목에 오를 수 있는가 이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답한 70%의 시민들은 핵확산금지조약이란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아니, 훨씬 쉽게, 지금 북한이 저 꼬라지가 난 게 가당찮은 핵 보유(실제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때문인 건 알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사실 현재 구치소에 수감 중인 대통령의 지지율이나, 그가 속한 여당의 지지율 등이 생각보다 높게 나오고 있는 건 이른바 보수 과표집(정치적 성향이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전화 등의 수단을 이용한 여론조사에서 높게 표집되는 일) 때문이라고 보고 있긴 하다. 그래도 대통령의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과연 인용될 것인지 기각될 것인지, 이런 하나마나한 조사를 돈 써가며 할 필요가 과연 있는지 궁금하다. 이미 만천하에 드러난 게 12.3 불법 계엄의 증거이고, 정황인데 말이다.

손석희, 미안한 얘기지만 이제 에전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

한 가지 더 붙여서. 현재 시국에서 그나마 민주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시청률도 괜찮게 나오고 있는 방송국이 바로 MBC. 설날이었던 어젯밤엔 ‘친정’에 돌아온 손석희, 그리고 유시민과 홍준표 등을 섭외하여 <손석희의 질문들>을 특별 편성했다. 나름 야심찬 기획이었을 터. 솔직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진 않았고 중간에 조금씩 끊어서 보다가 오늘 아침엔 인터넷에 올라온 몇몇 클립을 봤다.

보고 나서 든 생각. 앞으로 지상파 채널에선 MBC든, KBS든 시사 프로는 진짜 볼 일이 없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손석희는 과거의 총명하고 예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기계적 중립이란 틀에 (스스로)갇혀서 답답하기만 했다. 홍준표야 뭐 예전부터 말투도 그렇고 인상도 그렇고 느글거리기만 했으니 더 붙일 말도 없고. 유시민은 뭔가 작정을 하고 나온 듯하게 발언 수위도 생각보다 쎈 편이었다.

그런데 유시민의 위 발언 수준이 높다는 건 어디까지나 지상파 방송의 기준에서인 거고, 사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같은 채널에선 자주 들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굳이 지상파 TV에서 시간 맞춰가며 볼 필요가 없다는 뜻. 실제로 어젯밤 특별 편성된 <손석희의 질문들>은 시청률이 8.6%로 집계되었다. 일반적으로 지상파 채널의 시청률은 시청 가구 수를 백분율로 나타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8.6%란 시청률은 10 가구 중 채 한 가구도 시청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반면 시청자/청취자 수가 실시간으로 집계되는 유튜브의 경우 출근 시간에 보고 듣는 이가 압도적으로 높은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일간 평균 30만, 전날 큰 이슈(예컨대 대통령의 체포라든가 구속 같은)가 있었던 날은 1백만 정도의 수치를 보이는 것.

그런 거 다 제쳐두고, 어제 <손석희의 질문들>은 까놓고 말해서 재미가 없기도 했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손석희가 적당히 맺고 끊어주며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진행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했고. 바로 그 점에서 위에 이야기한 ‘기계적 중립’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가 한참 ‘끗발 날리던’ 시절 지상파 방송에선 반드시 그렇게 했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이 어디 그런가? 현직 대통령을 관저에서 체포하는 ‘그림’을 가장 멋지게 잡아낸 건 1인 미디어인 고양이뉴스이고,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국회 청문회나 각종 위원회도 어지간해선 수만 명에 달하는 라이브 시청자가 보는 세상이다.

미디어의 생산과 소비 트렌드 자체가 이젠 공룡이 되어버린 레거시 미디어들에겐 더 이상 어울리지 않게 된 것. 그런데 그걸 그들 스스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상황인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가 맞이하는 황혼의 시간을 내 생전에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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