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시대, 내란의 시대

<시빌 워>를 봤다. 미국에선 작년 여름엔가 아무튼 진작 개봉했고, 관련 정보를 접했을 때부터 꼭 보고 싶었는데 왠지 국내 개봉은 계속 연기되던 차, 결국 2024년의 마지막 날 개봉을 했고, 봤다. 보고 나서 느꼈다. 국내에서 개봉을 한 타이밍이 진짜 예술적(?)이었구나 하는 점을 느꼈고, 이거 의외로 호러 장르인데? 하는 점도 느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미국에서 내전이 벌어진 상황을 그렸다. 다만 어떤 이유로 인해 내전까지 발발한 것인지 정확히 언급하진 않고 있는데, 일단 대통령이 3선까지 했고(미국 대통령은 재선까지만 할 수 있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중 포격 명령까지 내렸다는 언급이 나오는 걸로 미루어 현직 대통령과 정부군이 일단 한 진영을 차지하고 있고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등이 한 배를 탄 서부 연합이 다른 진영에서 서로 대결을 벌이는 듯하다.

주인공은 종군사진기자 리(커스틴 던스트). 그리고 그의 동료 조엘(와그너 모우라), 새미(스티븐 핸더슨)에 신참이자 종군사진기자 지망생이기도 한 제시(케일리 스패니) 등이 워싱턴으로 가 대통령을 인터뷰하고자 한다. 영화의 대부분은 이들이 워싱턴까지 가는 과정을 로드무비처럼 그리며, 클라이맥스에선 총탄이 빗발치는 워싱턴/백악관에서 엔딩을 맞게 된다. 그리고 이 클라이맥스에서 대통령의 경호원들과 서부 연합군이 벌이는 총격전이 진짜 엄청난 스펙터클로 구현되었다! 제작사 A24 사상 최대 제작비가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비용 대부분은 바로 여기에 들어갔을 듯.

※ 덧붙이는 말: 개인적으로 이전까지 본 전쟁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운드 디자인은 바로 <지옥의 묵시록>에서 바그너의 <발퀴레의 귀환>을 배경으로 한 헬리콥터 부대의 베트콩 마을 포격 장면이었는데 <시빌 워>가 그에 못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내용 상당부분이 로드무비처럼 그려진 것도 두 편의 영화가 닮았네?

당연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지금/여기의 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이 지나치게 양극화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내고 있다는 건, 뭐 어디나 다 마찬가지니 크게 신경을 쓸만한 일까진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순진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터지고(다행히 국회의 의결로 금방 무산되긴 했지만) 내란의 혐의를 받는 대통령이 영장을 생까며 자신의 관저에서 코빼기도 내밀지 않고 있는 와중 그 밖에선 이 대통령을 반대하는 진영과 지지하는 진영이 경찰 저지선을 사이에 두고 맞서고 있다. 대관절 이 상황이 내전 상황이 아니면 대체 어떤 상황이 내전이란 말인가?

<시빌 워>는 나한텐 호러 영화나 다름없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시빌 워> 관람 후기를 취향 코너가 아닌 칼럼 코너에 싣게 되었다. 가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너무나도 현실감 넘치도록 담아낸 영화를 보면 진짜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뭔가 예지몽 같은 걸 꾸기라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희한하고 괜히 웃기기도 하는데, <시빌 워>의 경우 작품 내에서 그려진 모습이 너무 그럴싸해서 무서울 정도였다.

주인공 파티가 워싱턴으로 가는 중 한 미치광이(제시 플레먼스. 그는 주인공 커스틴 던스트의 실제 남편이기도 하다)를 만난 장면이 특히 무서웠다. 일단 그는 군복을 입고 군용 소총을 들고 있는데 그냥 군복을 갖춰 입은 민간인인지 아니면 무장 탈영병인지는 알 수가 없다. 물론 군복이나 소총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핑크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제정신은 아닌 인물로 보면 된다.

리와 조엘 등이 자신들은 미국인이니 총을 쏘지 말라고 하니 그 미치광이는 말한다. “미국인? 그래 알겠어. 그런데, 어떤 종류(what kind of)의 미국인?” 철저히 내 편, 아니면 다른 편이니 당연히 내 편이 아니라면 총을 쏘겠다는 이야기(근데 생각해보면 그냥 무조건 총을 쐈을 것 같긴 하다). 만약 <시빌 워>가 한국영화였다면, 그리고 만에 하나 영화 내에서와 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펼쳐졌다면 이 부분에서 나올 대사는 뻔하다. “어디 출신이야? 경상도? 전라도? 아님 또 다른 어디?”

정말이지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30~40년 정도 전까지 문방구에서 팔았던 이력서 견본에는 ‘출신도’를 명기하는 칸이 있었다. 안 그래도 좁아 터진 나라에서 내 편, 네 편 선을 긋고 갈라치는 일은 사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분열의 시대. 극단적인 양극화의 시대. 그 모든 갈등이 결국 내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참담하기 짝이 없다.

제시 플레먼스는 아주 짧게 나오는데 존재감이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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