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넷플릭스에 공개된 한국영화 <크로스>를 봤다. 취향 코너를 통해 따로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었고, 한숨이 폭폭 나왔다. 애초 극장 개봉을 위해 제작된 영화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개봉이 미뤄지다가 넷플릭스에 ‘팔린’ 경우란 사실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애초 예정대로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그야말로 쫄딱 망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에 공개되는 콘텐츠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도 보게 됐고.
극장 대신 OTT로 향한 영화들, 승부수 아닌 버리는 카드? (다음 뉴스/데일리안)
기사는 제목 그대로, 극장에서 개봉하는 대신 OTT 공개(즉, 적당한 가격을 받고 넷플릭스 등의 OTT에게 판매한)를 택한 콘텐츠들을 조명하고 있다. 한국산 콘텐츠 중 최초로 이와 같은 루트를 택한 <사냥의 시간>을 포함해서, <승리호>와 <콜> 등을 언급하기도 하고.
본 글의 내용과는 살짝 무관하게, 옛날 생각이 나서 덧붙이는 이야기. 홈비디오라는 ‘2차 판권 시장’이 흥하던 시절엔 영화가 일단 극장 개봉 후 일정한 기간(이를 ‘홀드백 기간’이라고 한다)이 지나고 나서 비디오로 출시가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극장 개봉작’은, 비디오 출시로 직행한 작품들과 달리 나름 프리미엄 딱지를 붙일 수 있어서(쉽게 말해 판매가를 조금 더 받기 위해) 영화 제작사/수입사들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예컨대 일주일이나, 아니면 불과 며칠이라도 어거지로 극장 개봉을 하는 꼼수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비디오 출시 재킷에 ‘XX극장 개봉작!’이란 카피가 들어있기도 했고. 지금으로부터 약 20~30년 정도 전, 극장 개봉작이 (상대적)프리미엄 대접을 받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애초 극장 개봉을 목표로 제작된 영화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OTT를 통해 공개(OTT에 판매)되는 일 자체는 특별한 입장을 가질 필요가 없는, 다분히 가치중립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단 링크의 기사에서도 전하고 있는 것처럼 최근 들어 ‘극장 개봉 대신 OTT 공개’란 루트 자체가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일종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요즘은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 대부분의 정보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이 우리 주변에 펼쳐져 있다. 그런 상황은 영화/드라마의 소비자들도 마찬가지고, ‘어떤(특정한) 영화의 극장 개봉이 여의치 않아 OTT로 방향을 틀었다’는 정보 자체가 아직 접하지도 않은 작품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처럼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다만 애초 극장 개봉을 목표로 했던 작품과, 처음부터 OTT 오리지널 컨텐츠로 기획되고 제작된 작품간 차이는 분명히 있다).

여기에 덧붙여, 이 부분과 관련하여 진작부터 주장했던 내용이 있어 전하고자 한다. 예전에 지인과 한 다리 건너 아는 지인(ㅋㅋㅋ;;)이 시나리오 작업 관련으로 넷플릭스 쪽 담당자와 미팅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넷플릭스 담당자는 자사의 콘텐츠 개발 및 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가 나름 인상 깊게 남았다는 말도 전했다. “우리(넷플릭스)가 좋은 콘텐츠라고 판단하는(그래서 투자를 하게 만드는) 기준은 글로벌한 흥행성을 갖췄는지의 여부”라는 것. 그리고 조금 의외이긴 한데, 한국에서 장르와 플랫폼을 불문하고 이름 좀 날렸다는 작가들한텐 거의 먼저 한 번 이상은 컨택을 했다고(이 부분이 의외였던 이유는, 별 근거는 없지만 왠지 넷플릭스라면 ‘아직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재야의 인재’들에 먼저 관심을 가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별 근거는 없다. ^^;;).
넷플릭스가, 좋은 말로 ‘창작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시스템으로 유명해진 것은 사실이다. 최근 들어선 조금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그래도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의 숨막히는 제작 시스템에 비할 바는 당연히 아니고, 최소한 충무로 제작사들의 시스템과도 비교하기 힘든 수준이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간단히 말해서, 넷플릭스에도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시스템에 준하는 제작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만약 영화라는 콘텐츠가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연출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넷플릭스는 지금처럼 그저 ‘쩐주’ 역할만 하면 충분하다고 볼 것이지만, 개인적으론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OTT 공개 자체가 안 좋은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상황이 이미 벌어진 것은 앞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넷플릭스도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인식을 극복하고 타파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와 같은 움직임의 일환으로 고려할 수 있는 요소가 바로 나름의 제작 시스템이란 이야기고, 현재 넷플릭스에 공개된(그리고 앞으로 공개될) 여러 콘텐츠들(오리지널 콘텐츠 포함)에 대한 기대감도 형성하고 나아가서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 아닌가 이 말이다.
제작 시스템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염두에 두고서 하는 것이란 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중 최고의 제작비를 들였다는 <삼체>만 해도 그럭저럭 평가가 괜찮지만, 초기작인 <브라이트>를 비롯, <레드 노티스>나 <그레이 맨>이나 <애덤 프로젝트> 같은 영화들을, 빈말로라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나?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편 넷플릭스는, 어쩌면 회사 설립 이후 최고의 기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징어 게임> 두 번째 시즌(의 파트 1)을 오는 12월 공개할 예정이다. 과연 황동혁 감독이 사실상 전권을 쥐고 온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