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번화가 요지에 위치한 5~10층 정도의 건물들 외벽에 큰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오는 4월10일에 예정된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출사표를 던진 후보(아직은 예비후보들이고, 곧 정당으로부터 공천을 받아야 ‘진짜’ 후보로서 자신을 알리는 선거운동을 할 수가 있다)들의 얼굴이 커다랗게 박혀있는 것.
당연히 현재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예비)후보들과, 야당이면서 국회에선 1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 (예비)후보들이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가운데, 작년 연말 정의당과 녹색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진 녹색정의당 또한 유권자들에게 열심히 자신들을 어필하는 중.
그런 와중에 웃기는 콩트 같은 상황도 한 편 펼쳐졌다. 국민의힘에서 탈당한 이준석 대표와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한 이낙연 대표가 설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합당 선언을 한 개혁신당이 불과 열흘 만에 깨진 것. 누가 봐도 오로지 선거만을 위해 모인 급조정당이긴 했으나 이렇게 빨리 결별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 못했다. 이미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판에서, 개혁신당의 이번 합당과 결별로 인해 두 명 모두 점수를 많이 깎아먹었다고 생각한다. 이준석 대표는 자신의 가장 큰 지지세력인 젊은 남성 유권자들로부터, 이낙연 대표는 나름 정치 고관여층으로부터 모두 지탄을 받은 것으로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대한민국의 전체 유권자를 베이스로 봤을 땐 ‘그냥 둘 다 아웃 오브 안중’이란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정치에서 지지율을 반짝 높이기 위해 연출하는 ‘컨벤션 효과’ 가운데에는 합당이 가장 강도가 센 편인데(그만큼 뉴스에 많이 나오기 때문), 합당 직후에 조사한 개혁신당의 지지율은 불과 4% 정도가 고작이었다. ‘빅텐트’니 ‘제3지대’니, 여러 뉴스에서 요란하게 떠들던 소리가 무색한 상황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총선도 그렇고 대통령선거도 그렇고,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거대 양당의 ‘전횡’에 피로감을 느낀다는 답변이 적지 않은데 왜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이른바 ‘제3지대 정당’에 표를 던지는 일에는 그렇게도 인색할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른바 사표 방지 심리 때문일 테고, 제3정당을 표방하고 나선 이들의 얼굴이 그다지 참신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제3정당이 유권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데에 실패한 것은 명백해 보인다.
물론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나름 의미 있는 행보를 보였던 제3지대 정당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정당은 통일국민당. 1980년대 말 ‘5공 청문회’에서 단단히 빡쳤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1992년 대통령선거에 나서면서 창당을 했는데, 그가 낙선하고 금방 정계에서 은퇴하자 정당도 그냥 흐지부지되었다. 통일국민당의 의의는 ‘이전까진 그 지역 유권자들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충청권과 강원권의 유권자들이 캐스팅보트를 쥘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켰던 일 정도라고 하겠다.
그리고 충청권 유권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며 나름 이름을 날렸던 자유민주연합도 있었다. 통일국민당보다는 조금 늦은 1995년에 창당했고 김종필 전 총리가 1인 보스로 군림했는데, 자민련의 경우는 창당한 해에 있었던 제1회 지방선거에서 특히 선전을 했다. 당시 지선에서 대전 + 충청권을 거의 싹쓸이하는 괴력(?)을 보여주기도. 그리고 마침내 ‘진짜’ 캐스팅보트를 시전했는데,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와의 전격 연합(합당은 아니고 공동 내각 구성의 연합. 이른바 ‘DJP 연합’이 바로 그것이다)을 통해 집권에도 성공했던 것.
그리고 그 이후엔 2016년에 창당한 국민의당도 있었다. 그 중심엔 당시만 해도 참신한(ㅋㅋㅋ) 이미지로 지지율이 높았던 안철수 대표가 있었는데, 창당한 해인 2016년에 있었던 제20대 총선에서 호남의 맹주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그런 상황이 펼쳐진 데에는 아예 공천을 받은 당의 유력 인사들이 애초부터 호남 지역에서 방귀 좀 뀌는(그러면서 민주당에선 공천을 못 받은) 이들이어서 가능했던 것이란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위에 예로 든 정당들 외에도, 그래도 원내에 있던 기간 중엔 선명한 노선을 제시하며 유권자들의 기대를 모았던 민주노동당(제17대 국회에선 좋은 의미에서의 ‘파란’을 일으켰던 바로 그 이름!)도 제3지대 정당의 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민주노동당의 경우는 위의 통일국민당, 자민련, 국민의당처럼 선거를 코앞에 두고서 이합집산을 한 경우가 아니라서 결이 다소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니, 결코 짧지 않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한때나마 유권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제3지대 정당들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막강한 1인 보스(라고 쓰고 얼굴마담이라고 읽는다) 체제와 지역주의에 기댄 인상을 갖고 있다는 표면적인 부분 외에, 어쩌면 더 중요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보수적 색채가 짙다는 것이다. 아예 1인 보스가 성공한 기업가였던 통일국민당도 그렇고, ‘대한민국 최초의 정치 9단’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도 마찬가지. 국민의당은 조금 다른가 싶지만, 솔직히 안철수가 진보 정치인이라고는 차마 하지 못하겠고.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엔 크게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가설은, 해당 정당 자체가 처음부터 보수주의를 표방했다는 것(혹은 유권자들에게 그렇게 각인되도록 포지셔닝을 했다는 것). 이 관점은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정치사를 통시적으로 보면 어렵지 않게 설명된다. 대한민국에서 지금까지 정권을 가장 많이(라고 해봐야 둘 중에 하나지만) 잡았던 정당은 범보수 계열의 정당이다. 당연히 현재 여당인 국민의힘도 여기에 포함된다. 한 명이라도 유권자가 더 많은 쪽에, 숟가락을 얹어도 얹어야 하는 것.
두 번째 가설은, 지금껏 나름 성공을 거둔 제3지대 정당에 더 많은 유권자들이 더 많이 표를 던졌다는 것.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상황엔 부가 설명이 약간 필요하다. 우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대한민국의 정치와 언론 지형 자체가 보수 진영에 유리하게 짜여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 대한민국 전체 유권자들의 표심 자체가 진보보다는 보수에 가깝고, 자연스럽게 범보수 계열의 정치집단이 성공할 여지가 조금이라도 더 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 민주노동당이나 정의당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한민국에서도 매우 극단적이거나 중립적이면서 그래도 진보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저 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들은 투표를 할 때 고민을 많이 하고, 더 선명한 노선을 가진 정치집단을 선택하는 일이 많다. 소수가 소수로 계속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래도 반짝 성공을 거둔 역사가 있는’ 대한민국의 제3지대 정당들에 대해 살펴봤다. 그리고 또 떠오른 궁금증. 오는 4월 총선에서 과연 제3정당이 유의미한 지지율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굳이 예상을 해보자면, 오는 선거에서도 결국 거대양당이 유권자 대부분의 표심을 가져갈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 현재 여당과 야당의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하고, 그로 인해 각 정당의 지지자들이 더욱 단단하게 결속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 그렇긴 하나 선거에서 섣부른 예측만큼 무의미한 게 없으니, 일개 사인(私人)으로선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서 기다려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