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벽두에 묘한(?) 일이 벌어졌다. 현역에서 은퇴한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지만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여전히 ‘빅네임’이라고 할 만한 서태지가 28년 전 발표한 곡의 리마스터링 버전을 발표했고, 그로부터 불과 며칠 지나선 강한 개성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SM의 걸그룹 에스파가 바로 그 곡의 리메이크 버전을 발표했다.
그 노래는, 바로 <시대유감(時代遺憾)>.
유명 뮤지션의 과거 히트곡을 후배들이 (새로운 편곡과 퍼포먼스를 통해)새로 내놓는 일이 드문 건 아니지만 서태지와, 에스파와, 그리고 <시대유감>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서태지라는 이름은 왜 2024년에 다시 소환됐는지, 에스파는 이 프로젝트에 어떻게 함께 하게 되었는지, 결정적으로 ‘왜 지금, <시대유감>인지’ 곰곰이 살펴보는 일은 나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 같다.
- <시대유감>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것들
90년대 중후반을 전후로 해서 국내외 뮤지션들의 음악을 조금이라도 들었던 사람이라면 서태지, 그리고 <시대유감>에 대해 ‘일어났던’ 일을 모르지 않을 테지만 주의 환기 차원에서 다시 짚어보기로 한다. 1995년, 그러니까 학교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이제 사회에 진출한지도 수 년이 지나 각계에서 자리를 잡아나가려는 세대에 속한 이들이 태어났을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가수가 음반을 내려면 그 전에 공연윤리위원회(줄여서 공륜)로부터 사전심의를 받아야 했다. 말하자면 내 음반에 실릴 곡에 어떤 가사를 실을 건지, 국가기관으로부터 검열을 받아야 했던 것.
서태지는 자신의 4집 앨범(이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이름의 팀이 공식적으로 발매한 마지막 앨범)에 <시대유감>을 싣고자 했는데, 공륜에서 일부 가사의 삭제 및 수정을 요구하니 이에 빡쳐서(…) 아예 곡 전체에서 가사를 들어내고 연주만, 즉 ‘Instrumental’ 버전을 앨범에 실어 내놓았다. 그러면서 검열의 부당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고, 대한민국 대중문화 역사에서 매우 드물게 정치권에서도 공론화(엄밀히 말하자면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에선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당시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 그리고 김대중 총재가 이에 화답했다)가 이어지며 앨범이 발매된 해인 1995년 12월 결국 사전심의제는 완전 철폐되고 사후심의제가 실시되었다.
한 가지 덧붙이면 가요의 사전심의제 철폐에서 서태지와 <시대유감>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부당함을 지적한 뮤지션이 서태지 한 명만 있던 것은 아니다. 정태춘의 경우 <아, 대한민국>(1990년)이나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년) 같은, 당시의 기준으론 ‘대놓고 불법’인 음반들을 내놓으며 지속적인 문제제기와 함께 가요에 대한 검열제도 자체를 헌법소원에 부치기도 했다. 그 때 정태춘의 법정 공방에서 그와 함께 했던 변호사가 바로 노무현이고.

아무튼 그런 곡절을 가진 <시대유감>이 2024년 1월부터 다시 울려 퍼지게 된 근저에 어떤 이유가 있을까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니, 복잡하게 생각할 게 별로 없다는 결론을 떠올리게 되었다.
- 왜 서태지인가?
뮤지션으로서의 서태지에 대해 갖는 감정은 당연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많은 이름들이 명멸했던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서 그는 정말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는 것일 텐데, 당연히 그 저간에는 서태지 본인의 명민한 감각과 풍부한 감수성 같은 부분들이 깔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태지라는 이름에서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한 가지 이미지가 있으니, ‘주변과 타협하지 않는 반골’이란 점이 바로 그것이다. 서태지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던 초반만 해도 ‘고등학교조차 자퇴하고 록밴드(시나위)에서 베이스 쳤던 소년’ 출신으로 그를 알리는 기사가 나온 적도 많았다. 사실 앞서 이야기한 <시대유감>의 사연이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같은 앨범에 실린 <필승>에선 “널 죽일 거야”라는 가사에 대한 공륜의 수정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그냥 ‘삐-처리’를 해버린 것도 그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다.
이는 서태지가 2024년에 다시 소환된 이유에 대한 작은 힌트(?)라고 하겠다. 뒤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 왜 에스파인가?
에스파는 현재 명실상부 SM 엔터테인먼트의 대장주라고 할 만한 걸그룹이다. 동시에 데뷔 때부터 명확한 콘셉트와 세계관을 지속 유지하고 있는데, 각 멤버가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설정이 데뷔 초반엔 거의 코믹하게 받아들여졌을 정도. 아예 걸그룹 자체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웹툰과 소설까지 존재하는 르세라핌도 있는 판국에 ‘아바타 멤버’들도 있다는 이야기가 뭐 그렇게까지 신박하진 않을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에스파라는 팀이 지향하는 음악과 앞서 언급한 세계관이 무척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동년배(?)인 뉴진스와 르세라핌 등에 비해서도 장르간 믹스가 과감하고, 이는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요컨대 팀 자체의 강렬한 개성과 명확한 콘셉트가, 여러 가지 실험적인 시도로 인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바로 지금 <시대유감>을 리메이크하는 작업에 있어서 에스파만한 팀이 또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2024년에 <시대유감>을 다시 부르기에 레드벨벳은 너무 ‘메이저’가 되었다. 뉴진스는 솔직히 이미지가 너무 안 맞고, 르세라핌은 뭐랄까 너무 ‘안정적’이다.
- 그래서, 왜 <시대유감>인가?
그럼, 애초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아니, 내친 김에 28년 전인 1996년으로 돌아가보자. 어쩌면 세상의 모든 창작자는 자신이 두 발 딛고 선 사회와 교감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나아가서 시대와 공명하는 작품이야말로 창작자 본인의 의지 표출은 물론 대중의 호응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에.
요컨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은,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라는 미증유의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중요한 부분 한 가지가 더 있다. 아주 솔직히, 만약 <시대유감>이 애초 서태지가 공륜에 심의를 넣은 그 가사 그대로 앨범에 멀쩡하게 실려서 대중에 공개됐다면 지금과 같은 위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창작자가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사고에 대해서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깝깝한 현실을 고발할 수 있는데, 당시의 권력기관은 그런 목소리조차 마음껏 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검열’이라는 시스템으로 군림하면서.
<시대유감>은 결국 ‘유감스러운 시대’의 결과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제목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2024년에 서태지가, <시대유감>이 다시 소환된 것 또한 지금의 시대가 그토록 ‘구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오컴의 면도날’급으로 통렬한 해석이 아니고 또 무엇이냔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의심이랄까, 아쉬움은 남는다. 서태지의 원곡이 세상과 사회에 대한 시끄러운 외침을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담아냈다면, 에스파의 버전에선 대상을 조명하는 시선 자체가 내부로 침잠한 느낌을 준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고, ‘숱한 가식’이 판치는 세상에서,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리는 일’이 올 것 같다는 독백이 그저 단순한 투정처럼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선 앞서 이야기했던 모든 내용보다 훨씬 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바로 내가 꼰대이기 때문이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