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정효 작가가 지난 7월1일 별세했다. 향년 82세. <은마는 오지 않는다>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2023년의 정확한 한국어 표기법에 따르면 ‘할리우드’가 맞지만 원작의 제목이 ‘헐리우드’라고 되어 있으니 그렇게 작성한다), 그리고 <하얀 전쟁> 등을 대표작으로 남겼는데, 그 대표작들이 모두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그 영화들도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 모두,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보고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도 기억에 남아서 그 기억을 정리하며 작가를 추모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영화들에 대한 비평보다는 그저 개인적인 기억과 단상을 읊어보는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개봉관에서 보진 않았고, 한참이 지난 다음 동네 변두리의 이른바 ‘동시상영관’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딱히 영화를 꼭 봐야 되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영화는 보게 되었다(?). 누구랑 같이 봤는지, 아니면 혼자 봤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영화를 보긴 봤던 기억은 분명히 남아있다.
당시만 해도 전쟁, 특히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선 명백한 선악 구도(당연하지만 북한 인민군이 절대악으로, 한국군은 절대선으로 그려진 영화가 대부분이었다)가 나왔지만 그런 내용보단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개인과 집단의 모습이 보여진 부분이 꽤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젊은 과부가 동네에 들어온 미군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장면 때문에 반미 의식을 조장한다(?)면서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무튼 당시 어렸던 나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였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아,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이 영화 중간에 나왔던 기억도 나고.

<하얀 전쟁>
이 영화 개봉 당시 ‘베트남에서 촬영한 베트남전 영화’라는 내용의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서, 그럼 다른 베트남전 영화들(예컨대 <플래툰>이나 <디어 헌터>, <지옥의 묵시록> 같은 영화들)은 베트남에서 촬영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기억도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많은(주로 할리우드산) 베트남전 영화들은 베트남이 아니라 각종 인프라가 조금 더 나았던 태국이나 필리핀 등지에서 촬영을 했다고.
<하얀 전쟁>도 바로 직전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 그 전쟁으로 인해 망가지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란 점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고 전쟁영화로서 스펙터클이 부족했는가 하면 또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작품 속에서 베트콩 군대의 공세에 맞서 주인공 부대가 진지를 사수하는 전투씬이 하이라이트로 펼쳐지는데, 해당 장면의 스펙터클이 당시 한국영화 수준에선 무척 뛰어났던 기억도 있다.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본 적은 없는데, 아마 요즘 다시 봐도 괜찮을 정도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고.
참고로 안정효 작가는 실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얀 전쟁>을 집필했다. 그 원작 소설도 예전에 읽었는데, 영화엔 안 나왔지만 원작에는 있었던, 훨씬 끔찍한 장면도 기억난다. 아마 오리였나 거위였나 아무튼 둘 중 하나가 전사자의 시체를 뜯어먹는(…) 장면. ㄷㄷㄷ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개봉 전, 꽤 인기가 높았던 주말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두 명, 최민수와 독고영재가 주연으로 나와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어렸을 때부터 미국영화에 푹 빠져 그야말로 ‘헐리우드 키드’로 살았던 주인공(나이를 먹은 후에 충무로에서 조감독이 된다)을 그린 이 작품에서 참 희한했던 부분은 바로 오프닝(이었나, 엔딩이었나, 아마 오프닝이었을 듯).
연출을 맡은 정지영 감독은 할리우드 영화가 직배를 통해 들어올 때 이를 반대하기 위해 스크린쿼터 사수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고, 심지어 직배 영화가 상영되는 영화관에 뱀을 풀어(아마 대한민국 최초의 할리우드 직배 영화 <위험한 정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감방에 가기도 했던 인물. 바로 그 정지영 감독 본인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서 다른 영화인들(임권택 감독 등)과 함께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영화 오프닝에 그대로 쓰인 것이다! 이에 대해 원작자인 안정효 작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까마득한 옛날에 봤던 영화에 대한, 오랜 기억을 끄집어냈다. 거의 30년 정도 전의 기억이구나.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 오늘 저녁은 빈대떡에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옛 추억에 젖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