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 문학의 거장이며, 실제 스파이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도 알려진 존 르 카레 작가의 대표작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갑자기 생각났다. 참 고풍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통수’에 ‘통수’로 대응하는(…) 사건이 펼쳐지는 와중, 마치 법정물을 연상시키는 엔딩까지. 다시 생각을 해봐도 참 ‘우아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론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봤고, 좋아하는 작품.
아무튼 이 작품이 그렇게 재미있고 인상 깊었던 이유는, 당연하지만 서로 적대하는 진영의 최일선에 선 정보기관과 그 기관에 소속된 스파이들의 활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말은 이렇게 하지만, 마치 <007> 시리즈 같은 활극이 나오는 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서로가 서로를 적대한다는 것. 영국 정보기관이 소련 정보기관의 통수를 치는 데에 이유가 어디 있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 그냥 저 앞에 적이 있으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기서 정보를 빼오는 게 중요하지.
그런데, 서로 적대하는 진영도 아니고(정말 아닌가?) 우방으로 생각하는 진영이 다른 진영 최고위층을 도청해서 정보를 빼냈다면 어떨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용산 대통령실을 도청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동향 등의 정보를 빼냈다는 보도가 외신을 통해 처음 나온 것이 지난 4월11일의 일.
하필이면 이달 말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일정을 코앞에 두고 이런 일이 벌어졌고(이게 우연일까?), 마침 윤통의 미국 방문 일정을 협의하기 위해 미국에 출국해 있던 김태효 국가안보실 차장은 해당 사안에 대한 기자들의 물음에 매우 고압적인 태도로 응했다. 참고로 그는 청와대 기획관으로 근무하던 MB 시절 군사기밀 유출(!)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그리고 당시 그를 기소한 검사는 바로, 당시 서울중앙지검장 윤석열이었다!).
어이가 없는 일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CIA의 도청은 이미 미국에서도 사실로 인정했고(그리고 이에 대해 어떤 책임 있는 논평도 없었고) 외신에서도 그와 같이 보도했는데, 대통령실은 엉뚱하게도 ‘(언론에 보도된 의혹이)상당 부분 왜곡되었다’면서 ‘악의로 도청을 했다는 정황은 없다’느니, ‘반미 선동을 획책하는 움직임에는 엄중 대응할 것’이라느니 하는 뻘소리를 하고 있다.

사실 미국 정보기관의 청와대(및 대통령실) 도청이 ‘사실’로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단 사실로 밝혀진 이전 두 번의 케이스는 공교롭게도 시니어 박통과 주니어 박통(!) 시절. 시니어 박통이야 말년에 핵무장을 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미국과 나름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으니 미국에 항의를 하는 시늉이라도 했고, 주니어 박통도 유감표명 정도는 했다. 그런데 꼭 지지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만 기세등등한 지금의 정권은 미국 앞에선 꼬랑지 내린 강아지마냥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상황. 오히려 상황을 축소하기에 급급하니, 이에 대해선 외신에서조차 희한한(?) 일이라며 조롱하고 있다. 사르르 녹아 내리는 국격. 그 와중에 조선일보는 미국의 도청은 거의 상시적(?)인 것이고, 굳이 따지고 들 필요도 없으며(?) 러시아가 조작한 자료일 가능성이 있다는 등 나발을 불어대고 있다. ㅋㅋㅋ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보자. 스파이 장르가 재미있는 건 서로 적대하는 진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이 무능한 정권이 재미라곤 1도 없는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고 있을 때 국민은 울화통이 터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