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주권을 강제로 침탈한 일제의 서슬이 퍼렇게 살아있던 1919년,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나서며 수 개월간 한반도 전역에서 이어진 뜻 깊은 3.1 독립운동 주간에 작성하는 칼럼이 그 시작부터 매우 개탄스러운 현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음에 가슴이 아프다.
대한민국의 국경일인 삼일절, 어느 집에서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걸리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일본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근데 일장기는 어디서 났을까). 그 집의 주인은 이웃의 항의가 잇따르자 한국이 싫어서 그랬다느니, 본인은 일본인이라느니(그런데 사는 곳은 한국?) 이상한 소리를 해댄 상황. 아무튼 그는 “대통령이 ‘일본은 협력관계에 있는 국가’란 점을 밝힌 부분에 대한 옹호의 입장”이라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한 말을 살펴보자. “(전략)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을 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 (중략) 우리가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은 자명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얘기. 이를테면 ‘우리가 약해서 일본이 침탈을 한 것’이란 얘기.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갈 것도 없이, 간단하게 비유하자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게 ‘평소 행실을 똑바르게 했으면 그런 일이 벌어졌겠냐’라고 하거나, 대형 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에게 ‘그러게 얌전하게 지낼 것이지 왜 그런 델 갔냐’라고 하거나, 학폭을 당해 괴로워하다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한 학생에게 ‘네가 만만하게 보였으니 일진 아이들이 너를 괴롭힌 것 아니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 한 마디만 더하자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참 희한하게도 ‘한국전쟁은 남한이 약해서 북한이 쳐들어온 것 아니냐’란 얘기는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걸까?
왜 이렇게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진 걸까?

한국 사람들이 ‘착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서 이야기한, 삼일절에 자기 집에 일장기를 단 사람은 ‘자기 집에 일장기를 달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느냐’고 따졌다고 하는데, 물론 그런 법은 없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이스라엘 국경일에 나치 깃발을 내건 거나 마찬가진데 이스라엘에서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을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레오폴드 대학살이 벌어졌던 콩고 국경일에 벨기에 국기를 내걸면 어떻게 될지 상상을 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한국이니까’ 그저 이웃들이 항의 정도만 하는 걸로 끝났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부분도 없잖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본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선 죄를 저지르고도 적당히(?) 빠져나가고,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150여 명이 사망을 하는 초대형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그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고, 30대 청년의 퇴직금 50억 원이 ‘사회 통념상 큰 액수지만 다른 이에게 뇌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낮아서’ 무죄 방면을 받고, 수 년에 걸친 학폭으로 한 젊은이의 인생을 무참히 짓밟아 놓고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명문 국립대에 입학해서 학교 잘 다니는 사람도 있고.
밑도 끝도 없이 사회 탓, 나라 탓 하고 싶진 않지만 보고 있으면 정말 자괴감이 느껴지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적어도 부끄러움을 안다면, 염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냥 넘어가기 힘든 일들을 오늘도 보고,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