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의 일이다. 한 웹툰 작가가 팬들을 위한 사인회를 열기로 했는데, 참석을 위한 예약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 이에 책임이 있는 사인회 장소인 카페가 피해를 입은 예약자들을 위해 SNS에 공지를 올리며 “심심한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라는 글을 올렸는데 이를 본 일부 네티즌들이 ‘사과가 왜 심심하냐(!)’며 지적을 하고 나섰다. 급기야 ‘난 하나도 안 심심한데(?)’라는 글까지 올라오기도.
당연히 ‘사과’라는 단어 앞에 오는 ‘심심한’이라는 수식어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간절함’이라는 한자어 ‘甚深’이란 것을 모른 이들로부터 시작된 해프닝인데, 한 발 비껴 서서 바라본 이 ‘심심한 해프닝’에선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 첫째. 사용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 한자어를, 그것도 공식 사과문에 꼭 썼어야 했나 하는 것. 특정한 한자(어)를 쓰고 안(혹은 덜) 쓰고는 나이의 문제는 아니지만, 말하자면 ‘나이가 많다고 한자(어)를 많이 쓰거나 알고, 반대로 나이가 적다고 한자(어)를 거의 쓰지 않거나 잘 모르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나이가 많을수록 한자(어)를 많이 쓰는 편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중년 이상의 나이는 되어야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그나마 덜 어색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다소 지나친 일반화로 비쳐질 수 있다는 점, 인정한다).
그리고 둘째. 그 어떤 사람(혹은 단체, 회사, 기관, 그 어떤 대상이든)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는 마당에 ‘재미있는 사과’도 아니고 ‘심심한 사과’를 한다고 하면 거기서 심심하다는 단어에 혹시 자신도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거나 하다못해 스마트폰으로 검색이라도 해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사과가 심심하대 ㅋㅋㅋ 난 안 심심한데”라고 비아냥거릴 일인가 하는 점이다. 요컨대 말의 전후 맥락을 따져서 뭔가 어색하다거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뭐가 이상한지를 살펴봐야지,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고 뜯고 하는 일이 과연 온당한가 하는 것이다. 조금 다른 상황이지만, 올 상반기 화제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추앙’이란 단어는 주인공이 스마트폰으로 단어 뜻을 검색하는 장면과 함께 화제가 되었고 화제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선 한국어를 잘 못하는 외국인 캐릭터가 ‘파괴’라는 단어를 역시 스마트폰으로 검색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정도도 못하나 이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이야기하기는(당연히) 힘들지만, 사람들이 뭔가 잔뜩 곤두서있는 듯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런 사람들 안에 포함된다는 생각도 든다. 많은 사람들이 칼날 위에 불안하게 서 있으면서 이를 갈고 있다가, ‘껀수’ 하나 걸렸다 하면 너도나도 비난의 화살을 던지는 상황.
이번 일은 고작 단어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말 그대로 해프닝 수준에 불과하지만, 적지 않은 우리 사회 구성원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인 대부분의 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좀 있어 보이려고’ 쓰는 사람도 별로 없는 한자어를 쓰는 건 스노비즘에 불과하다고 하거나(불과 2년 전, ‘명징하게 직조한’이란 한 줄이 얼마나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창피한 줄이나 알 것이지 잘났다고 떠드는 게 꼴불견이라고 하거나, 그 모든 의견이 어쨌든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연구한 학자 찰스 U. 라슨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선 3가지 과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1) 전달자와 수용자가 능력이 동등하고 미디어에 대한 접근성 또한 동등해야 한다. 2) 논점의 주제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3) 비판적 수용자는 메시지의 내용이 정확히 확인되기까지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번의 ‘심심한 해프닝’에선 당연하게도 위의 3가지 과제 중 어느 하나도 이룩된 것이 없다. 그러니 이 사달이 날 수밖에.
다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참 피곤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칼날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참 피곤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럴 땐 뭘 해야 하나. 그냥 커트 코베인의 노래나 듣자. MTV 언플러그드 무대에 올랐던 커트 코베인의 ‘All Apologies’를 백만 년 만에 다시 들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