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불라 라사(Tabula Rasa)가 문제가 되는 경우

캔버스는 거기에 어떤 작품이 그려지는지가 중요하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Banksy)의 작품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타불라 라사(Tabula Rasa)란 말이 있다. 라틴어로 ‘깨끗한 석판’을 뜻하며, 우리말로 바꾸면 ‘아무것도 적지 않은 순백의 종이’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다분히 철학적 개념인데, 간단히 설명을 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는 마치 백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나면서 이후에 겪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본성을 가꿔간다고 이야기할 때의 바로 그 ‘백지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타불라 라사.

애초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확립된 바 있는 이와 같은 철학적 개념을, 근대에 와서 다시 주목한 사람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존 로크. 그는 ‘인간 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사람은 마치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과 같으며 주변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은 오로지 스스로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로크가 체계적으로 정립한 타불라 라사의 개념은 후에 장 자크 루소, 이마누엘 칸트 등 쟁쟁한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타불라 라사라는 개념이 근대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조명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

우선 그 첫 번째. 사람이 태어날 때 백지상태와 같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매우 급진적인(?) 사고로 이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왕족도, 귀족도, 천민도 태어날 때는 누구나 ‘평등하게’ 백지상태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 말하자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건데, 만민평등의 정신이 바탕에 두고 근대 시민사회의 기틀을 마련한 프랑스 시민혁명의 정신과도 연결이 되는 것.

그리고 그 두 번째.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적절한 교육을 통해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출 수 있다고 본 것. 이런 시각은 인식론과 교육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역시 시민이 주인이 되는 근대적 사상의 토양을 마련하는 데에 일조한 것이다.


‘타불라 라사’를 쳐다보는(?) 대통령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을 다녀온 윤석열 대통령이 스페인 마드리드 현지에서 업무를 보는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업무 중’의 모습이라고 공개된 사진에서 그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빈 화면뿐인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고, 아무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백지를 바라보고 있다.

이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자 대통령실에선 보안 문제 때문에 일부러 빈 모니터나 백지를 보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라고 해명을 했다. 특히 모니터에 대해선 ‘현지에서 국무회의 안건 결재 직후 내용이 사라진 모습을 촬영한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지적은 이어졌다. 상황을 보아하니 마드리드 현지 숙소에 있는 데스크탑 PC인 듯한데 인트라넷을 사용하지도 않는 현지 데스크탑 PC로 국무회의 안건을 결재했다는 해명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며, 백 번 양보해서 노트북이었다면 이 해명이 덜 어색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바로 그것.

아무튼, 대통령실에서 그렇다고 하니 일단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 보기로 한다. 앞서 언급한 타불라 라사라는 개념과 그와 관계된 이론도 이후에 몇몇 학자들에 의해 반박이 되기도 했다. 후천적 경험에 의해 사람의 여러 가지 특성이 결정되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이 유전적 요인이라는 점이 현대에 와서 밝혀지기도 했고, 교육에 의해 모든 이들이 동일한 특성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자칫 파시즘과도 연결이 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

종합하면 후대 학자들에 의한 타불라 라사에 대한 반박은 어디까지나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다. 근데 대통령실이란 곳에서 내놓은, 본의 아니게 ‘빈 화면과 백지’, 그러니까 타불라 라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그 해명이란 게… 까놓고 말해서 너무 후지지 않냐 이 말이다. 이렇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해명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