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에 관한 세 가지 아이러니

슈퍼맨이란 이름을 듣게 된 당신.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무엇인가?

아마도 많은 이들은 슈퍼맨을 인류가 창조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주인공 캐릭터로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 코믹스의 주인공으로 태어나 영화, TV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미디어 장르에서 활약하며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캐릭터가 바로 슈퍼맨.

그렇긴 한데 적어도 영화에서 우리가 최근에 만난 경우는, 단독 작품으론 벌써 12년 전인 2013년 <맨 오브 스틸>이었고 팀업 작품으론 2016년의 <배트맨 vs 슈퍼맨>, 이듬해인 2017년의 <저스티스 리그>를 통한 만남이었다(그 이후 잭 스나이더 감독이 러닝타임 4시간짜리로 다시 편집한 감독판이 2021년에 또 나오긴 했지만, 그건 재편집판이니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은 이 분야에 나름 관심이 있는 이라면 흥미롭게 지켜볼 만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배트맨 vs 슈퍼맨>과 <저스티스 리그>를 모두 시원하게 말아먹은(…) 잭 스나이더 감독이 하차했고, DC의 많은 슈퍼히어로들이 팀을 이루게 되는 이른바 ‘DC 유니버스’의 전권을 제임스 건 감독이 갖게 된 것. 참고로 DC의 영화화 판권을 갖고 있는 워너브라더스는 아예 휘하에 ‘DC 필름스’란 회사를 차렸고 제임스 건 감독이 그 공동 대표가 되기도 했다.

제임스 건 감독을 비롯한 수많은 스태프들은 새로운 <슈퍼맨>의 기획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패인을 분석했을 것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전작들은 왜 (결과적으로)실패했는가? 왜 더 많은 관객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는가? 왜 더 많은 평론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는가? 나아가서, 왜 이전의 DCEU 작품들은 총체적으로 망했는가?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 명쾌한 해답이란, 있을 수가 없는 노릇. 위에서 살펴본 다양한 질문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그저 제임스 건 감독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슈퍼맨을 위해 준비한 비전(의 단초)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선 뒤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단순명쾌하지만, 아이러니한 존재. 2025년의 슈퍼맨

2025년의 <슈퍼맨>이 이전까지의 작품들(에 나온 슈퍼맨)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게 독특한 점이라면, 파워가 생각보다 약하다(?)는 점이다. 아예 맨 첫 장면부터, 악당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축 늘어진 슈퍼맨으로 시작할 정도. 게다가 그런 슈퍼맨을 구해주는 존재는 멀쩡한 사이드킥도 아니고 ‘크립토’란 이름의 슈퍼개(犬). 본작에서 크립토는 그야말로 주인공 슈퍼맨에 못지 않은 엄청난 활약(?)을 하는데, 앞으로도 시리즈에 계속 나올 것 같진 않다(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시리즈에 나올 것 같긴 하다).

슈퍼맨인데 ‘슈퍼’하지 않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이후에 다른 슈퍼히어로 캐릭터들과 팀을 구성해야 하는 ‘어른의 사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솔직히 슈퍼맨 혼자 완벽한데 굳이 팀업을 할 이유가 없긴 하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본작에서의 슈퍼맨은 ‘대책 없이 순수한 존재’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슈퍼맨>의 첫 번째 아이러니는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구석이 있긴 하다.

<슈퍼맨>의 두 번째 아이러니는, 슈퍼맨이란 신분(?)을 속이고 평소 사람 속에서 지내는 클라크 켄트와, 그의 연인 로이스의 직업이다. 알다시피 두 사람은 ‘데일리플래닛’이란 신문사의 기자. 슈퍼맨이 처음 태어난 1930년대만 해도, 그리고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는 1970년대~80년대까지만 해도 양질의 정보를 가장 신속하게 접할 수 있는 기자라는 직업의 가치가 있었지만(예컨대 무시무시한 빌런의 위협이 벌어진다거나,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21세기는 그야말로 ‘시민 모두가 기자이자 편집장’인 시대 아니던가. 게다가 본작에서 슈퍼맨이 누명을 쓰고 악플(?)에 시달리게 되는 일조차 신문이나 TV 뉴스가 아니라 시민들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론화가 될 정도.

그러니 21세기의 슈퍼맨, 아니 클라크 켄트가 여전히 신문기자인 것은 시대착오적일까?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사실 본작에서도 초반에 로이스가 슈퍼맨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캐릭터가 더 명확해지는 지점이 있으니 나름 의미가 없지 않은 설정이란 생각이다. 덧붙이면, 신문사라는 직장 자체가, 뭐랄까 스테레오타입화 되어 있다는 느낌도 있어 비주얼과 함께 드라마를 재미있게 구성하기에 적절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두 번째 아이러니까지도 영 받아들이기 힘든 정도까지 가진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아이러니에 와선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가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그것은 바로, 슈퍼맨이 첨예한 국제 정세에 직접 개입한다는 점이다.

작중에선 가상의 국가 보라비아(아무래도 이스라엘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가, 역시 가상의 국가인 자한푸르(아무래도 중동의 제3세계 국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를 침공하는데 슈퍼맨은 이를 물리적으로 막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보라비아의 로봇 군단으로부터 ‘다구리’를 당하고 곤죽이 된 슈퍼맨이 첫 장면에 등장하는 것이고.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슈퍼맨은 본인 스스로 ‘어디까지나 선의로 전쟁을 막으려 했다’고 하고 있다. 물론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가뜩이나 복잡하면서도 첨예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슈퍼맨에게 특정 국가, 특정 정치 세력의 ‘편’이 될 자격이 있는가의 여부다. 작중에서 보라비아는 최첨단 무기와 화포로 무장하고서, 고작해야 농사 짓는 데에나 쓸 쟁기와 몽둥이 정도만 손에 든 자한푸르 시민들을 공격하려고 한다. 그걸 슈퍼맨이 막았다는 건데, 따지고 보면 자한푸르 시민들만 불쌍한가? 보라비아군 병사들은, 첨단 무기를 들었으니 ‘상대적으로 안 불쌍’한가?

누가 뭐래도 시민을 구하는 일에는 열심인 슈퍼맨

물론 작중에서 보라비아 대통령은 악당 렉스 루터와 결탁하기도 했고, 몹시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로 묘사된, 명백한 빌런이어서 슈퍼맨의 직접 개입이라는 설정도 가능해졌을 게다. 그렇다곤 해도 실사 영화에선 터부시될 수밖에 없는, 슈퍼히어로의 국제 정치 개입이란 문제가 다소 가벼이 다뤄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바로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지러운’ 상황에 대한 제임스 건 감독의 대답이기도 할 것이다. 얼마 전 두 번째로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쏟아놓는 난맥상은 말할 것도 없고, 진영간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는 중. 유럽은 좀 다른가 해도 어지럽긴 여기나 거기나 매한가지. 특히 난민이 많은 서유럽 국가들 중 상당수에선 극우에 가까운 정당이 대거 집권하면서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정서가 팽배한 상황이다. 엄청난 능력을 가졌고, 누구보다 선한 성격을 가졌는데, 따지고 보면 이민자(지구 바깥 출생이니 이민은 이민)인 슈퍼맨은 어쩌면 2025년의 미국이, 나아가서 전세계가 이상으로 삼을 만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제임스 건 감독이 보여준 ‘새로운 슈퍼맨’의 비전은 과연 성공적인가? 누군가 물어본다면 안타깝게도 동의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시 맨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제임스 건 감독이 새로운 DCU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면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점은 사실 본작 <슈퍼맨>에 다 나와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슈퍼히어로(들). 이에 열광할 관객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을 관객도 있을 것이다.

아주 솔직한 개인 감정 하나만 덧붙이기로 한다. 주연을 맡은 데이비드 코렌스웻, 그리고 새롭게 선보인 슈퍼맨 코스튬 모두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도 않고 근사해 보이지도 않네. ‘슈퍼맨’이라고 하면, 어떤 식으로든 눈을 확 잡아 끌면서 관객을 금방 몰입시키는 ‘쎈’ 임팩트가 있어야 할 텐데 본작의 슈퍼맨에겐 그런 부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장대한 스펙터클이 이어지지만 솔직히 <맨 오브 스틸>에서의 아찔한 격투(슈퍼맨 vs 조드 장군, 그리고 파오라 등)에 비하면 그저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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