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영화들 리스트 중에 <더 록>이 있다. 1996년 작품이니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 전의 영화. 당시만 해도 아직은 마이클 베이 감독이 천지분간 못하고 사방팔방에서 뻥뻥 터뜨리기만 하던(…) 때가 아니고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신뢰 받는’ 제작자 중 한 명인 제리 브룩하이머가 능력발휘를 하던 때. 근데 그런 시절이 30년이나 지났다니. ㅠㅠ
전체 드라마가 거의 완벽하게 짜인 이 영화에서 유독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 허멜 장군이 인질을 하나 끌고 와서 사살을 하려던 찰나, 메이슨 대위(숀 코너리)가 스스로 인질이 되면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 “모름지기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시고 자란다고 하지. 토머스 제퍼슨”이라고 허멜 장군이 읊자 “애국심이란 사악한 자의 미덕이지. 오스카 와일드”라고 일갈하는 메이슨 대위. 그러자 곧바로 메이슨 대위는 허멜 장군으로부터 한 대 얻어맞는다. ㅋㅋㅋ
아무래도 이 장면에선 메이슨 대위가 인용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에 관심이 집중된다. 오스카 와일드가 누구인가? 당대의 문필가 소리를 들어 마땅한 그는 작가로서의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 런던에서 보냈지만 정작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 단순히 그의 고향만 보고서, 그를 두고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애국심 운운하는 발언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도 영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한 발짝 더 들어가볼 구석이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성애자인 부인과 결혼하여 자녀까지 두었지만 그 스스로는 동성애자였고 바로 그 이유(동성애자라는) 하나만으로 인해 지인으로부터 고발당해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다가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을 살다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불과 46살.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은 미국산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가 대한민국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 받고 구속되었다. 당연히, 스티브 로저스가 구속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영화 속 그의 복장을 그대로 재현해서 입고는 주한 중국대사관과 서울 남대문경찰서에서 소란을 피운 안모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한심한 관심병 종자 이야기를 꺼내기 전 오스카 와일드를 소환한 것은, 당연히 ‘애국심’이란 가치에 대해 조명하기 위함이었다. 서기 1900년에 사망한 작가가 생전에 애국심을 (다소간)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언급했다는 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1백 하고도 수십 년은 전부터 맹목적인 애국심은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일 텐데, 정말 ‘쿠데타’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정권을 찬탈한 군인이 수십 년간 최고의 권력을 갖고 지배한(그리고 그들이 사망한 지금까지도 그런 행위에 대해 합당한 처벌을 받지 않은) 나라에서 돌이켜보는 오스카 와일드의 비전은 큰 의미를 가진다.
알다시피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도 대사로 언급된 것처럼 ‘바른 생활 사나이(‘Man of Righteous’)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진영을 승리로 이끌고는 얼음 속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그 앞에선 슈퍼히어로일지언정 말투도 조심해야 하고, 행동거지도 당연히 삼가야 한다. 당연하지만 그는 ‘애국심의 화신’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자신의 조국인 미국이 파시즘의 마수에 빠지는 것을 몸 바쳐 막아낸다(그러면서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와 반목하게 되며 ‘시빌 워’가 시작되는 것이 의외의 아이러니인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조명하려면 별도의 지면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민국 헌법은 물론이고 국민의 기본권마저 부정한 윤통의 비상계엄을 지지하는 자가 ‘하필이면’ 캡틴 아메리카 코스프레를 한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물론 복잡한 고민 없이, 그저 한국에서 꽤 인기 있는 할리우드 영화 속 캐릭터가 캡틴 아메리카이고 그 관심병 종자가 하필 좋아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냥 그렇게만 치부하기엔 참 의미심장한 상황이지 않은가.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캡틴 아메리카를 사칭하고 길거리에서 난동을 피운 바로 그 작자의 머릿속에서 최대한으로 구체화된 ‘애국적 행동의 발로’가 바로 그 난동이었다는,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결론인 것. 듣자 하니 바로 그 가짜 캡틴 아메리카는 이전에 실제 CIA 요원이라거나, 안중근 장군의 후손이라거나, 심지어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요원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참 다양한(?) 신분 사칭을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나면… 진짜 2025년 대한민국에서 ‘애국심’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일조차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사악한 자’가 집착하는 가치가 애국심이라는, 바로 그 애국심이 조롱을 받는 사회. 얼마나 안타깝고도 슬픈 사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