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역사는 계속된다. 근데 이제 여기에 해학과 달관이 약간씩

무릇 정치집회란 그러했다. 한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표정에서부터 비장한 각오가 드러나곤 했다. 마이크를 잡고 연단에 선 누군가가 어떤 구호를 외치면 사람들은 일사불란한 ‘팔뚝질’과 함께 그 구호를 따라서 외쳤다. 그리고 역시나 비장하기 짝이 없는 가사가 가득한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어진 행진을 막아선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급기야 최루탄과 물대포가 등장하기도 했다.

적어도, 지난 20여년 전까지의 모습은 그러했다.

사안만 놓고 따지면 1980년대나 그 이전, 어쩌면 1990년대 초~중반 정도까지의 상황과 비교하여 크게 다를 것도 없던 이슈로 인해 열린 2000년대 초반의 집회는 일단 그 명칭에서부터 기존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젠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해진 ‘촛불문화제’. 이명박 정권 당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저지를 위한 시민들의 모임에서부터 시작된 그 모습이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그리고 2024년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위한 집회로 이어진 것.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결기는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달라졌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현장을 가득 채우는 ‘에너지’의 저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엔 종이컵을 밑에 받친 양초였다. 그것이 건전지로 작동하는 LED 촛불로 바뀌더니, 급기야(!) 아이돌 그룹의 공연에 등장하는 팬들의 응원봉까지 출연.

현장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또 어떻고? 물론 여전히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노래가 불려지는 한편으로 (이젠 21세기 대한민국 시민들의 집회에선 ‘제2의 애국가’처럼 여겨지는)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신해철의 <그대에게>, 블랙핑크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APT.> 등이 그 옛날 <철의 노동자>나 <해방을 향한 진군>이나 <민중권력 쟁취가>를 대신하고 있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모습의 집회

그리고 한 가지 더 눈 여겨볼 만한 부분은 젊은 여성들의 참여가 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나가본 현장에선 거의 고딩이나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의 여학생들을 참 많이도 봤다(물론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비율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중장년에 속하는 아재들도 많이 봤을뿐더러 접는 자전거와 농구공을 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온 남학생들도 많이 보긴 했다). 만약 예전처럼 화염병이 날아다니거나 최루탄, 물대포가 시민들의 대오를 위협하는 상황이 아직까지도 계속 펼쳐졌다면 결코 보기 쉽지 않았을 광경임에 분명했다.

그래선지 이번 집회를 앞두고서 인터넷 게시판에선 ‘만약 피치 못할 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젊은 여성 참가자들은 재빨리 각종 단위 노조 깃발 아래로 이동한다면(이런 깃발 아래엔 확실히 아재들이 많았다)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란 집회 팁까지 올라왔을 정도.

여기에 여러 시민들의 넘치는 재치를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깃발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여러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이나 ‘제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혹은 ‘내향인’ 같이 폭소를 터뜨리게 만드는 문구가 적힌 깃발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현장에서 본 가장 인상적이었던 깃발은 ‘늙고 지친 직장인을 위한 빠른 탄핵 빠른 구속’이었는데 ㅋㅋㅋ 워낙 급하게 지나간 깃발이라 사진을 찍진 못했던 게 아쉽다.

아직 모든 게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어쨌든 (당시)현직 대통령이었던 자가 불법적으로 터뜨린 비상계엄은 ‘국회에서 적법하고 완벽한 절차를 거쳐’ 해제되었고 그 대통령은 역시 국회에서의 결의에 의해 현재 탄핵으로 궐위된 상태. 그렇지만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가서 최종 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다음주, 혹은 다다음주, 어쩌면 내년(!)까지 종로에 있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아직까지도 이 집회가 부담스러워서 한 번도 길에 나선 적이 없다면 꼭 함께해볼 것을 권한다.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했듯 현장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무게감도, 서슬 퍼런 경찰의 시선도 없다. 그저 즐거운 축제, 대의를 위한 큰 목소리라는 자부심, 해학과 달관으로 무장한 시민들의 뜨거운 결기가 존재할 뿐이다.

저항의 역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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