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이 활약하는 마블의 <어벤져스> 시리즈나 슈퍼맨, 배트맨 등의 주인공이 유명한 DC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이제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에는 익숙할 것이다. 슈퍼히어로들이 활약하는 이런 대중문화 콘텐츠 중에서도 실사 영화 쪽에선 비교적 최근 들어 시도된 테마라고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코믹스 쪽에선 사실 꽤 오래 전부터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비슷하지만)다른 세상이 저 너머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내용이라고 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천문학이나 물리학 등 실제 과학 분야에서도 의외로(?) 매우 진지하게 다뤄지며 논의되는 테마이기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직까진 그 존재에 관한 실체적 증거가 없다.
대신 멀티버스에 대한 관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주로 ‘서브컬처’ 분야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사 영화의 경우, 노골적으로 말해서 어떤 이유로든(특정 캐릭터가 작중에서 사망했거나, 특정 배우가 해당 배역에 대해 잠정 은퇴를 했거나 등) 작중에서 더 이상 출연하지 않게 된 배우를 얼마든지 다시 데려올 수 있는 ‘치트키’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제작사나 창작자 입장에선 이 얼마나 편리한가!
다만 이를 즐기는 팬의 입장에선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모양새. 당장 지난 주 코믹콘에서 소개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MCU 복귀 소식에 대해 시리즈의 팬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져 격론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세계관 최고의 인기 캐릭터를 맡았던 배우가 다시 돌아온다니 기대가 크다’고 하는 의견이 있는 반면, ‘새롭게 만들어서 도입할 신선한 아이디어가 얼마나 없었으면 이미 사망한 캐릭터(배우)를 다시 데려오느냐’라는 의견이 있는 것. 특히 그의 복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중에선, 스스로 산화한 최고의 히어로(배우)가 악당으로 다시 출연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그렇거나 말거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어벤져스> 차기작에 복귀할 때도 필연적으로 멀티버스 세계관은 다시 언급될 것이 분명하다.
서두가 길었다. MCU에 처음 멀티버스 떡밥이 뿌려진 이후부터 이를 유독 못마땅하게 여기는 팬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분명한 한 가지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다만 본 글은 멀티버스에 대해, 혹은 MCU의 제작진에 대해 잘잘못을 가리자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라 그저 상황에 대한 중립적 언급임을 밝힌다).

앞서 ‘코믹스에선 멀티버스라는 테마가 진작부터 활발하게 다뤄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블 코믹스는 애초에 마블 멀티버스라는 평행우주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각각의 우주를 ‘지구’라고 부르며 저마다의 번호를 붙여 이를 관리해왔다. 이 중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우주의 지구 번호는 616으로 나타나 있다.] 이영수, <멀티버스에 기반한 마블 코믹스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 한국애니메이션학회, 2014, 189-209
그런데 멀티버스를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마블은 물론 DC와 같은 미국 코믹스에 대한 지식이 사전에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진작부터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을 즐겼던 이들에게 익숙한 일본식 망가나 아니메와 크게 다른, 미국산 코믹스의 두드러진 특성에 대한 이해. 그것은 바로, ‘여러 작가가 자신만의 작풍으로 유명 캐릭터를 새롭게 그린 작품’을 받아들이는 팬들의 인식이다. 한 가지 예로, 배트맨이란 캐릭터는 미국의 만화가 밥 케인이 1939년에 처음 탄생시킨 이후 브루스 웨인이 그 실제 주인공의 자리를 맡고 있는 것이 이 바닥에선 상식이다. 그런데 길고 긴 코믹스의 역사에서 배트맨 가면과 수트를 입은 인물이 브루스 웨인 한 명만 있었던 건 아닌데, 개중엔 브루스 웨인이 사망하고(!) 그의 조력자(딕 그레이슨)가 대신 배트맨이 된 경우도 있다.
게다가 캐릭터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조명하여, 아예 다른 장르(슈퍼히어로라는 기본 장르 외에 스릴러-<배트맨: 허쉬>, 호러-<악마의 십자가>, 드라마-<다크나이트 리턴즈> 등으로 구분되는)가 된 버전도 존재할 정도. 배트맨은 그렇고, 슈퍼맨은 어떨까? 칼-엘이 미국 캔자스의 농장 대신 소련 영토에 불시착해 철권의 독재자가 되는 작품(<슈퍼맨: 레드 선>)도 있다. 희한한 점은 미국의 코믹스 팬들 사이에선 이와 같은 다양한 비전을 받아들이는 일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
이는 특정한 한 캐릭터가 주인공인 한 가지 이야기가, 길면 몇 십 년간 계속 이어지는 일본식/한국식 만화(혹은 그런 서사)에 익숙한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겐 무척이나 생소한 일이다.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그린 ‘고뇌하는 손오공’이나,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이치로가 그린 ‘통통 튀는 에반게리온’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우라사와 나오키가 <플루토>에서‘아톰’을 (새롭게)그리긴 했구나.

상대적으로 역사가 오래 된 DC 코믹스의 경우 외에, 이제 실사 영화 시리즈로 더 유명해진 마블 또한 훨씬 적극적으로(세계관의 구분을 위해 넘버링까지 붙여가며) 멀티버스를 다뤘다. 마블의 경우 최고 인기 캐릭터인 스파이더맨과 (코믹스 한정)최고 인기작인 <판타스틱 4>의 캐릭터들이 여기저기서 엮이는 일이 많다.
결론을 말하면, 멀티버스라는 세계관에 진작부터 익숙했던 미국의 대중문화 소비자들에 비해 우리나라의 소비자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는 그저 ‘인식의 차이’인 것이지 누가 ‘문화적 내공’(만약 그런 게 정말 있다면)이 더 깊고 얕으며, 누가 낫고 그렇지 못하고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누가 봐도 <엔드게임> 이후 나온 MCU 작품들 중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Vol.3>나 <데드풀과 울버린>, <닥터 스트레인지 2>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이 쓰레기였고 똥줄이 탈 만큼 탄(…) 디즈니는 오로지 ‘경제적인 이유’ 만으로도 로다주를 부랴부랴 다시 불러오는 등 멀티버스를 더욱 강화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명백해졌다는 것이다.
멀티버스란 세계관에 대해, 사람들의 인상이 저마다 다른 이유에 대해 고찰해봤다. 개인적으론 멀티버스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MCU가 언젠간 결국 열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였다고 보는 입장인데… 현재까진 그 결과가(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진 않는 게 이 시리즈의 팬으로서 좀 안타깝긴 하다.
마지막으로 지난 번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빌런 닥터 둠으로 MCU에 복귀한다는 소식을 전한 뉴스에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덧붙인다. 내년 개봉 예정인 <어벤져스>의 새 시리즈 제목은 원래 정해졌던 <캉 다이너스티>에서(누구도 ‘캉’의 이름을 말해선 안 돼! ㅋㅋㅋ) 새로 바뀐 <어벤져스: 둠스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