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황무지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사막이나 다름 없는 황무지에선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황무지는 물론이고, 사막이나 깊은 정글 같이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생명체는 존재한다. 단, 그 열악한 환경에 반드시 적응해야만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원칙. 그렇지 않은 생명체는 모두 죽어버리기 때문에.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이하 <퓨리오사>)의 황무지에서, 주인공 퓨리오사(안야 테일러 조이)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터득한 생존의 법칙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고향이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일에 대한 분노,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일에 대한 분노,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잃은 일에 대한 분노, 종합적으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부정당한 일에 대한 분노 등.
그리고 황무지에서의 생활 자체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존재로부터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당연히 적당한 수준의 물리력도 갖춰야 한다. 퓨리오사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사격술을 배웠을 것으로 추측되며, 시타델에서 오랜 기간(신분을 숨기고) 지내면서 전투 트럭 등의 기계를 만지고 제작하는 일도 배웠다. 그러고 보면 현명함까지 갖춘 것이니, 어찌 이 장대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를 주름잡는 주인공이 아닐 쏘냐!

<퓨리오사>의 유일한 단점으로, 바로 전작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라는 점을 꼽는 이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 액션 장면이 전작에 비해 심심해졌다는 데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전작처럼 박진감 넘치는 자동차 추격전 장면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투 트럭을 둘러싸고 펼치는 화끈한 액션과 시타델에서 워보이들의 공중 강하(?) 같은 액션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꽤 근사한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오히려 전작에서 봤던 ‘태양의 서커스’ 액션 연출에서 더 진화한 모습.
또한 전체적인 세계관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향후 시리즈가 더 확장할 수 있는 여지도 마련했다(그러나 해외와 국내 모두에서 흥행 성적이 생각보다 나쁘고, 고령의 조지 밀러 감독이 제작사인 워너와 전작의 수익 정산 부분에서 오랜 기간 분쟁을 하는 바람에 에너지가 많이 고갈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서 현재로선 새 시리즈가 나올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진 않는다. ㅠㅠ). 이전까지 <매드맥스> 시리즈에서 이 황무지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명확히 언급되진 않아서 조금 궁금하긴 했는데, 시타델 / 무기 농장 / 가스타운 등의 각 부족이자 국가가 그럭저럭 나름대로(?) 외교와 무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 언급되었다.
주연 퓨리오사 역을 맡은 안야 테일러 조이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불허전. 혹자는 전작의 샤를리즈 테론에 비해 살짝 포스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지만, 젊은 퓨리오사의 강렬한 이미지를 잘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샤를리즈 테론의 퓨리오사를 생각하니 정말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짜’ 페미니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는 말. 1979년 개봉한 첫 번째 작품으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나 다시 만들어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시리즈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등장인물들의 이름 아닐까 한다. 본작인 <퓨리오사>의 경우도 제목이 아예 주인공 이름인데 그 이름은 누가 봐도 명백히 ‘분노(Fury)’라는 단어에서 온 것. 그 외에도 ‘임모탄’이니 ‘스플렌디드’(전작에서 임모탄의 부인들 중 하나)니 하는 이름들은 모두 캐릭터를 완벽하게(그리고 무척 쉽게)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본작의 메인 빌런 ‘디멘투스’의 이름도 되새겨볼 만하다. 디멘투스라는 이름은 ‘치매’라는 뜻의 영어 단어 Dementia에서 온 것일 터. 그렇다면 디멘투스는 치매 환자? 꼭 그렇게 보기보단 그저 일종의 블랙 유머라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사실 치매 환자의 대표적인 특성 중 하나는 일반인에겐 크게 중요하지 않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집착한다는 것인데, 디멘투스의 경우 낡아빠진 곰 인형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설정상 매우 가까웠던 가족(혹시 딸?)이 아끼던 물건으로 쉽게 추측이 가능한데, 어쩌면 자상했던 아빠이자 가장이었던 디멘투스가 어떤 이유로든 가족을 잃은 이후 극도로 포악하게 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고.

전작 못지 않게, 어쩌면 전작보다 더 화끈해진 <퓨리오사>가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흥행 성적이 신통치 않다는 것이 못내 안타깝기만 하다. 해외 미디어에선 전체 제작비를 약 1억 6000만 달러 정도로 보고 있는데, 이 정도 제작비가 들어간 규모의 영화 치곤 매우 드물게 개봉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2차 판권 시장에 나오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영화관 티켓 값이 많이 오른 요즘 같은 때, 하드한 영화 팬들조차 어지간한 대작이 아닌 경우 ‘조금만 기다리면 OTT로 풀리겠지’라고 생각하며 아예 영화관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사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거실 소파에 눕듯이 앉아서 편하게 TV로 보기보다는 넓은 스크린과 빵빵한 사운드 시스템에서 관람할 때 더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바로 <퓨리오사>가 그런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