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인, 경찰, 소방관, VIP 경호원, 국가대표 운동선수, 스턴트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이 한정된 공간 안에 모여 팀을 이루고 일정한 룰에 따라 서로를 아웃시키는 이른바 ‘서바이벌 예능’은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꽤 익숙한 포맷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이런 포맷이 비교적 최근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 수십 년 전, 당대의 아이돌들이 갯벌에서 조개 잡고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 앞에서 재롱을 피우거나, 국민 MC가 역시 당대의 스타들을 모아놓고 30분간 진행하는 근황 토크로 시청자를 빵빵 터뜨렸던 시절의 예능도 따지고 보면 상대가 지쳐 쓰러질 정도로 상대에게 가학적이었던 ‘생존의 법칙’을 체화하고 있었으니까.
그 시절 예능에 비하면, 한강변의 경관이 기가 막히는 주상복합이나 레지던스 꼭대기 층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사는 연예인들의 생활을 조명하거나, 아니면 경치 좋은 해외 유명 관광지를 돌아다니거나 아예 식당을 차리거나 하는 식의 요즘 예능은 오히려 자극이 덜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각설하고, 올 봄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국내외 시청자들의 큰 관심과 여러 가지 화제거리를 자아냈던 <피지컬 100>에 이어, 그 ‘여성판’을 표방한 <사이렌: 불의 섬>(이하 <사이렌>)이 공개되었다. 참고로 <사이렌>은 에피소드 10편까지 공개된 현재까지 확인된 흥행 성적은 안타깝게도 제작비 대비 나쁜 편이어서 새 시즌 제작은 요원해졌다.

앞서 <사이렌>을 두고 ‘여성판 <피지컬 100>’이란 식으로 조명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보다는 <강철부대>나 <얼티밋 솔저 챌린지>(히스토리 채널 방영) 같이 특수부대 출신 군인들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프로그램들과 <사이렌>의 차별점은 출연진 모두가 여성이라는 점이다(참고로 메인 연출자 이은경 PD 또한 여성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방관 팀의 한 출연자는 현장에 출동했을 때 본인이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경찰 팀의 한 출연자는 ‘남성 직원(경찰)들한텐 사람들이 형사님이라고 하는데 나한테는 아가씨라고 한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1) 그렇다고 해서 <사이렌>이 남성 기득권 사회의 삐뚤어진 가치관을 조롱하거나 쓴소리를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방송, 나아가서는 글로벌 OTT 플랫폼에서 이전까지 조명한 적이 없던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내기에 좋은 조건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다만 그런 전제가 무색하게 <사이렌>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만 공개되었다는 게 의아하다면 의아한 부분이다).

<퀘이크> 등의 FPS 게임을 통해 접했던 ‘깃발 빼앗기’를 연상시켰던 장면
동시에, 어쩌면 <사이렌>은 첫 미션부터 출연자의 성별을 구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웅변하는 듯했다. <사이렌>의 첫 미션은 각 팀이 ‘크고 아름다운(그리고 몹시 무거운)’ 각 팀의 상징 깃발을 들쳐 메고 갯벌을 통과하는 것. 물론 그 과정에서 온몸은 진흙투성이가 되어 누가 누구인지, 누가 어느 팀 소속인지, 심지어 여성인지 남성인지까지도 구분하기가 힘들게 된다(이게 과한 해석이라고 한다면, 님 말이 옳습니다).
이전까지 유독 넷플릭스에서(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들의 섹슈얼리티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모습은 그리 낯설지도 않다. 게다가 최근에는 트렌드를 적극 반영해서(?) 단지 (남성)이성애자들을 겨냥한 프로그램 외에도 LGBTQ 카테고리로 구분되는 프로그램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인데 말이다.
한번 더, 2) 그렇다고 해서 <사이렌>이 이른바 페미니즘의 사상에 복무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서바이벌에 참가한 24명은 그저 ‘소방관’이고 ‘군인’이며 ‘운동선수’일뿐, 생물학적 여성이란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사이렌>의 출연자들이 보유한 ‘피지컬’만 놓고 봐도 길거리에서 만나는 평범한 남성들 90% 정도는 가볍게 제낄 수 있는(?) 수준 아닌가?
다만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서(!) 스포츠 브라 차림으로 장작을 패는 모습은 남성 이성애자의 시각으로서나, 여성 동성애자(혹은 이성애자, 양성애자 모두)의 시각으로서나 무척 섹시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었다! ^^;;
<사이렌>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은, 하루 24시간 중 언제 무인도 전체에 울려 퍼질지 알 수 없는 ‘사이렌’이다. 바로 기지전. 각 팀은 자신들이 보유한 기지 내에 팀의 상징 깃발을 숨기고, 모두 나가 다른 팀의 기지를 점령하든 아니면 끝까지 자신들의 기지를 지키든 선택할 수가 있는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팀 vs 팀, 개인 vs 개인의 전투가 발생한다.

ㅠㅠ
앞서 <사이렌>이 <강철부대>를 비롯한 타 서바이벌 예능과 다른 점이 출연진 모두 여성이란 점을 언급했는데 사실 그것 말고도 다른 차이점이 있다. 이전의 밀리터리 서바이벌 예능에서 주력 미션은 부대와 부대가 맞붙는 참호격투 같은 게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미션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완료하는 이른바 타임 트라이얼이었던 것과 달리, <사이렌>은 팀과 팀이 전력을 다해 맞서는 전투가 메인 콘텐츠가 된 것. 제목부터가 <사이렌>이란 점만 봐도 제작진은 시청자의 흥미를 끄는 부분을 예리하게 캐치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팀과 팀이 맞붙는다고 해도 항상 전면전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팀과 팀 사이에 연합이 발생하고, 통수(!)도 벌어지는 등 다양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서바이벌 예능의 진짜 재미가 바로 이런 소소한 드라마에 있다는 걸 감안한 포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바이벌 예능의 또 다른 진짜(?) 재미, 바로 ‘빌런’ 팀/캐릭터의 탄생 측면을 봐도 <사이렌>은 일정 수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사이렌>은 초반을 지나면서 일찌감치(?) 군인 팀이 빌런으로 자리매김한 느낌이다. 실제로 기지전 중 정해진 규칙(상대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은 불가)을 어겨서 군인 팀은 직후 4명 중 2명이 아웃된 상태에서 기지전을 진행하기도 했고. 반면 군인 팀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운동 팀을 비롯한 타 팀과 연합을 맺는 소방관 팀이 그 반대 진영에 서 있는 느낌. 더불어 의외의 팀이 선전을 펼치기도 했고 예상치 못하게 패자부활전도 벌어지는 등 곡절이 펼쳐지는 와중 적어도 현재까지 공개된 에피소드 10편을 모두 보게 되면, 최후에 웃는 팀(개인이 아니라)이 어느 쪽인지 알게 될 것이다. ^^
다만 초중반을 지나면서 메인 콘텐츠인 ‘사이렌’을 제외하고선 미션 자체에서 특별한 재미가 발생하기보단 출연진의 개인 플레이(팀 간 연합, 기지전을 앞둔 경찰, 전략 수립 등)에 의존하게 된 부분은 다소 아쉬웠던 부분으로 지적할 만하다. 그리고 미션 진행 도중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그리고 실제로 발생했던) 출연진의 부상 등의 사고에 대한 대처도 그리 흡족하지 못했던 것도 아쉬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섹슈얼리티 너머에 존재한, 강한 그녀들의 생존 스토리는 많은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테마였다고 생각한다. 새 시즌의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진 점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