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불과 며칠 뒤에 어떤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일단 글을 작성 중인 현재 기준으로는 그렇다) 파울루 벤투 감독의 축구 철학은, 다행스럽게도(?) 딱 키워드 하나로 요약을 할 수가 있다. 바로 빌드업.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 진영의 최후방에서부터 최전방까지 볼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저항(압박)을 벗겨내고 공격 기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모든 행동을 뜻한다. 선수들 사이의 패스, 볼을 갖지 않은 선수의 오버래핑/언더래핑, 일대일 혹은 개인기에 의한 탈압박 등이 모두 빌드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벤투 감독의 지도 하에 대한민국 대표팀은 예전과는 비교하기도 힘든 수준으로 상당히 수월하게 지역예선을 통과하고 월드컵 10회 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지만, 대회 참가 전 열린 평가전 수 차례에서 경기 내용과 결과가 신통치 못한 모습을 보이자 벤투 감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비판의 요지는 그 ‘빌드업’을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는 것.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약체일 수밖에 없는데 강팀을 상대로 우리가 주도하는 경기를 하기보단 철저히 수비 위주로 하다가 역습 한두 번을 노리는 게 낫다’는 논리였다.
대회는 개막했고, 대한민국 대표팀은 조별리그 두 경기에서 한 번은 비겼으며 한 번은 졌다. 두 경기를 보면서 갑자기 생각난 인물이, 바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이탈리아는 비록 월드컵에 두 번 연속으로 출전을 못했지만(ㅠㅠ), “야외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활동은 축구”라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골수 사회주의자이면서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사를 하고 만 그람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어쨌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결국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에게 더 잘 맞는 전술은 기동전이었을까, 진지전이었을까? 일단 그람시에 의하면 기동전은 두 집단이 바리케이드를 두고 대치하다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는 대결이다. 굳이 축구에 비유하자면 수비라인을 깊게 내려놓았다가 적당한 기회를 포착, 순식간에 역습을 이끌어내어 일거에 경기를 뒤집는 플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굳이 이번 대회의 특정 경기에 비유하자면 일본이 독일에 역전승을 거둔 경기가 바로 기동전의 대표 사례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그람시에 의하면 진지전은, 일종의 참호전으로 사회 각 분야의 전선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투쟁의 방식이다. 동시에 지금으로부터 거의 1백여 년 전에 이미 자본주의를 굳건히 다진 나라에선 유일하게 성공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굳이 축구에 비유하자면 벤투 감독이 강조한 이른바 빌드업 플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가 이끈 대한민국 대표팀의 조별리그 첫 경기 우루과이전이 바로 진지전의 대표 사례라고 할 만하다.
지나친 일반화라고 지적한다면, 님 말이 옳습니다. 그래도 재미 삼아(?) 계속 이야기를 해보면, 기동전과 진지전 중에 결국 성공을 거둔 쪽은 기동전 아니냐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일본과 독일의 경기는 매우 특별한 케이스였다. 일본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낮은 점유율(26%)로 승리를 거둔 팀이다(이 점유율은 역시 이번 대회 초반 ‘자이언트 킬링’의 주역이 된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때의 30%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치다).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 ‘일단 수비를 촘촘히 한 뒤 일발 역습을 노린’ 이란, 웨일스, 모로코, 튀니지, 그리고 개최국 카타르 같은 대부분의 팀은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축구란 스포츠가 룰도 비교적 단순하고, 수십 년이 지나도록 큰 변화가 없을 것만 같아 보이지만 사실 축구는 매년 크고 작은 규정이 바뀐다. 없던 규정이 신설되기도 하며, 있던 규정은 폐기되기도 한다. 당장 VAR(Video Assistant Referees, 비디오 보조 심판)만 해도 2016년부터 도입되었고, 볼이 정확히 라인을 벗어났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센서가 공 안에 부착된 것도 지난 월드컵 때부터다. 그 외에도 축구에선 은근히 많은 요소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최종 트로피의 주인을 가리고 나면 어마어마한 분량의 보고서가 작성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 백서도 출간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이미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이른바 ‘선 수비 후 역습’이란 전술은 이젠 약체 팀으로서도 사실상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과 같이 전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팀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수십 년 전에 그람시가 보여준 비전을 추종할지어다. 사회 전 분야에 참호를 꼼꼼하게 파놓고 이를 통해 (좌파)이데올로기 확산을 꾀하는 진지전 전술에서 힌트를 얻은 듯,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서로가 서로에게 정확하고 촘촘하게 패스하고, 적극적으로 압박과 탈압박을 하며, 결국 헤게모니의 완전 장악을 목표로 열심히 뛴 것이다(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지금 벤투 감독이 좌파 사회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
불과 며칠 뒤면, 아마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이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갖는 마지막 경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경기)가 펼쳐진다. 상대는 H조의 최강이며 우승후보인 포르투갈.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대표팀의 플레이가 정작 월드컵에는 ‘두 번이나 연속으로 탈락한’ 이탈리아의 사상가로부터 영감을 얻은(것처럼 보이는) 것도 희한한데, 어쩌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마지막 경기(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 경기) 상대가 하필이면 자신의 조국 대표팀. 아, 그러고 보니 두 번째 경기에서 퇴장을 당한 벤투 감독은 포르투갈전에선 벤치에 앉지도 못한다. 이렇게 보니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의 대한민국 대표팀은 완전 혼돈의 카오스 상태. 그람시가 살아 돌아와 지금의 상황을 봐도 혼란함을 느낄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