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바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들이 최근 얼마간 양산 수준으로 쏟아졌다. 그들 중엔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흥행에도 성공한 작품들이 있었는가 하면, 혹평 속에 금방 꼬리를 감춘 작품들도 있었다. 어떤 영화의 흥행 성적이야 여러 가지 다양한 요인들이 맞물린 결과일 텐데, 대체적으로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는 흥행 성적을 예측하는 것만큼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이를 테면 이런 것: ‘후졌다는 소리를 듣는 영화는,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가 좋다, 혹은 나쁘다고 할 때 그 평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참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의 만듦새를 따질 때는 그저 영화 자체를 볼 일이지 특정 장르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사실성보다 중요한 건 당위성이고, 당위성만큼 중요한 건 개연성이다. 이와 같은 전제는 슈퍼히어로 장르든, 코미디 장르든, 멜로드라마 장르든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드웨인 존슨이 주연을 맡은 <블랙 아담>은, 말하자면 너무나도 전형적인 슈퍼히어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계기를 통해 초인의 힘을 손에 넣은 주인공이, 처음엔 좌충우돌하다가 역시 특별한 계기로 각성을 하고 마침내 시민의 편에 선다. 애초 DC의 슈퍼히어로 세계관에서 ‘블랙 아담’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한 슈퍼히어로는 아니고 일종의 빌런이자 안티히어로(슈퍼맨이나 샤잠과 대적을 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인 캐릭터인데, 그런 점에서 블랙 아담이 ‘좌충우돌하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냥 캐릭터의 성격이 원래 그렇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만한 건, 슈퍼히어로로서 블랙 아담이 갖고 있는 능력이 시각적으로 충분히 구현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선 이견이 별로 없을 듯한데, ‘이 바닥’의 그 어떤 슈퍼히어로도 비교하기 힘든 압도적인 무력과 비행 능력, 번개를 이용한 공격력 등이 구현된 부분은 <블랙 아담>에서 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 초반, 블랙 아담이 5천년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사람을 말 그대로 ‘구워버리는’ 장면이나 사지를 절단 내는 장면 등이 나오는데 이 영화의 관람 등급(12세 관람가)을 생각하면 의외로 놀랄 만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긴 하지만 성인 등급의 영화처럼 적나라하게 나오는 건 아니다). 그 외에도 박진감 넘치는 추격전과 JSA 멤버인 호크맨과의 결투 같은 부분도 꽤 인상적이다(특히 아몬의 집에서 둘이 치고 받고 싸우는 와중 깨알같이 ‘출연’한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플래쉬 같은 DC의 캐릭터들이라니! ㅋㅋㅋ)
말이 났으니 말인데, <블랙 아담>에 첫 등장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멤버들 또한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줘서 좋았다. 완고한 리더 호크맨, 얼빵한 신참 아톰 스매셔, 참 독특한 능력을 가진 사이클론, 그리고 우리 시대의 참 어른(!)의 모습을 보인 닥터 페이트 등의 캐릭터들은 따로 스핀오프가 나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

이야기는 그럼 어떨까? 앞서 <블랙 아담>은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구조를 따른다고 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군데군데 구멍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블랙 아담>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할 것 같으면, 블랙 아담이라는 캐릭터가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고, 향후 DCEU(DC Extended Universe, DC 세계관의 영화들과 그 세계관을 ‘DC 확장 유니버스’, 즉 DCEU라고 부른다)에서 어떻게 그려질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캐릭터 자체의 정체성이나 매력이 별로 보이질 않고 대신 그 자리에 ‘드웨인 존슨’만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계속 준 것이다.
그것도 할리우드로 진출해서 배우로서 나름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드웨인 존슨’이라기보단 WWE에서 레슬러로 활약하던 시절 ‘더 록’의 모습이 너무너무너무 선명하다 못해(…) 판박이처럼 보일 지경. 예컨대 피플스 엘보우를 시전하고서 관중석을 슥 노려보는 바로 그 모습. <블랙 아담>에선 블랙 아담이 누군가와 치고 받고 날아다니고 액션을 펼치고 있지 않을 때의 한 90%는 바로 그 표정과, 눈빛과, 모션을 보게 된다.
<블랙 아담>에서 주연 외에 제작자로도 나선 드웨인 존슨 본인이 캐릭터 구축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고, DC필름스(2022년 10월 제임스 건이 공동 CEO로 임명되면서 사명이 ‘DC 스튜디오’로 변경되었다)의 수뇌부들과도 꾸준히 커뮤니케이션을 하여 결국 헨리 카빌의 슈퍼맨 복귀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해진 것이다. 흥행에 대한 감각도 매우 영민한 것으로 유명한 드웨인 존슨인데, ‘블랙 아담’이 ‘더 록’의 사실상 자가복제 캐릭터에 머물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이란 기대를 가져보자.
주인공이 압도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슈퍼히어로 장르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재미가,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리고 DC가 아주 가끔(?) 그런 일을 잘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구석이라곤 별로 없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듯한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액션. 그걸 볼 때의 카타르시스. <블랙 아담>은 관객에게 그걸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