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을 재조명하는 ‘전기(傳記, Biography)’라는 장르의 역사는 거의 기원전으로 거슬러올라갈 정도로 길고, 정말 특별한 작품도 많았다. 유독 최근 얼마간은 특히 대중문화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각광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보헤미안 랩소디>를 비롯해서, (개인적으론 완성도 면에서 그보다 더 낫다고 본)<로켓맨>도 있었고, <엘비스>와 <휘트니>, 조금 전으로 타임테이블을 돌려보면 <레이>와 <드림걸즈> 같은 작품들에 대한 평가도 꽤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전기 영화라면 실존인물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나, 그 인물 인생의 어떤 한 부분, 어떤 한 가지 업적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반면,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그 인물의 어떤 한 가지 특징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되 그 과정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토대가 되는 작품이 있다. 이런 경우를 전기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누군가 만약 의견을 물어본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픽션이지, 전기라고는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실제 사례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조금 황당한 경우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이 뱀파이어들을 잡으러 돌아다닌다는 내용의 <링컨: 뱀파이어 헌터>란 작품(놀랍게도 실제 이런 작품이 있다!)이 바로 그런 경우일 터. 임금의 용모와 매우 흡사한 인물이 임금을 대신한다는 내용의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또 어떨까? 아주 극단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이란 이름의 핵잠수함(…)을 출격시켜 왜군을 몰아낸다는 내용의 작품이라면? 이런 경우를 전기라고 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오늘 리뷰를 할 작품 <블론드>(앤드류 도미닉 감독 / 아나 데 아르마스 주연)의 경우가 바로 후자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동명의 소설(조이스 캐롤 오츠 作)을 원작으로 하는데(원작은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한다! 그리고 국내엔 번역본이 두 권으로 나뉘어서 나왔다) 바로 그 원작 자체가 시작부터 ‘본 작품은 어디까지나 픽션’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그 픽션의 주인공이 실존인물 노마 진 베이커, 즉, 마릴린 먼로라는 것. 그리고 그 내용은 그녀에 관해 세간에 흔하게 떠돌던(매우 흉한) 소문을 노골적으로 그렸다는 것.

마릴린 먼로가 출연한 영화는 본 적이 없어도 그녀가 당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섹스 심벌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녀에 대해서,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는 꽤 많이도 흘러 다닌다. 이를테면 친부는 누군지도 모르는 채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홀어머니 밑에서 살았고, 그러면서 보육원을 떠돌았으며, 아버지(와 같이 심적으로 완벽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들과 결혼을 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짤막하게 누렸다는 것 등등.
반면 마릴린 먼로라는(배우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매우 의외인 부분, 그러니까 사실이긴 한데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이야기도 굉장히 많다. 예컨대 ‘머리에 든 것 없는 멍청한 금발미녀’라는 이미지로 소비되는 대표적인 배우가 바로 마릴린 먼로인데, 실제 그녀는 감수성이 매우 풍부하고 도스토예프스키와 제임스 조이스 등 고전 문학작품도 많이 탐독했으며 매우 똑똑하기도 했다고. 할리우드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프로덕션을 설립한 여배우가 바로 마릴린 먼로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녀에 대해 많이 알려진 이야기들과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전체적인 분량이야 어떻든 <블론드>에 나오긴 한다. 적어도 그와 같은 부분들은 원작에서도 언급이 됐거나,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담긴 결과라고 하겠다.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항간에 떠돌았던 확인되지 않은(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의 극화 부분. 할리우드 초창기 시절, 여배우가(신인 시절의 마릴린 먼로도 포함해서) 주연급으로 캐스팅되려면 제작사 관계자에게 성상납을 해야만 했다는 건 그냥 공공연한 사실로 인식할 수도 있겠다(물론 그게 당연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시대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 주니어가 먼로의 누드 사진을 볼모로 조 디마지오에게 협잡질을 하는 모습도 ‘백 번 양보해서’ 픽션이니까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자. 그런데 누가 봐도 존 F. 케네디인 대통령이 매우 비인격적으로 성폭행을 가하는 장면에까지 이르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가능했을까, 어떻게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할 생각을 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 덧붙이는 말: 엔딩크레딧에서 문제(?)의 그 대통령은 배역 이름이 그저 ‘President’라고만 나온다. 그리고 <블론드>에서 묘사되는 성적 표현은 생각보다 수위가 높지 않다. 공개 전 넷플릭스에서 내부 시사 결과 ‘표현의 수위를 대폭 낮춰달라’는 요구가 있었고 감독이 이를 수용하네 마네 논란이 다소 있었다고 하는데, 넷플릭스의 요구는 개별적인 성적 묘사의 표현 수위보다는 누구나 아는 인물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일에 대한 표현 부분을 조금 덜 노골적으로 해달라는 점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사실 성적 묘사의 수위로 따지면 <브리저튼> 쪽이 훨씬 높을 듯하다. ^^;;
글쎄, 픽션이라고는 해도(+ 원작 소설이 있다고는 해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실존인물을 다루는 <블론드>의 방식에 동의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나름 진지한 고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연출자의 선택일 건데, 그 선택에 대한 변을 듣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타란티노 감독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이소룡을 아예 엉뚱하게 그려놓고는, 얼굴에 철판 깔고 “이소룡은 원래 그랬던 사람”이라고, 누구도 믿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건 그냥 평소 캐릭터 따라 가는 모습이라고 해도 <블론드>는 또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어떤 영화가 안에 품고 있는 이야기에 동의하기가 힘들어도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논외의 경우일 수 있다. 말하자면, ‘거짓말을 매우 설득력 있게’ 하고 있다면 그건 그 자체로 평가해야 할 몫이라는 이야기. 그럼 그 부분은 어떠한가? 안타깝지만 그 부분에도 높은 평가를 하기엔 어렵겠다.
<블론드>는 작품 내에서 흑백과 컬러가 자주 바뀌기도 하고, 화면의 종횡비 또한 자주 바뀐다. 이런 경우 특정한 장면에서 정해진 컬러 톤이나 종횡비로 진행된다는 일종의 규칙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블론드>에선 그런 규칙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굳이 뜯어보자면 마릴린 먼로가 출연했던 영화가 흑백인 경우 그 때를 전후로 한 장면에선 흑백으로 나오는 듯하고 출연작이 컬러인 경우(그렇다. 마릴린 먼로는 무려 ‘흑백영화’와 ‘컬러영화’의 시절을 관통하는 시간 동안 활약을 했던 배우다) 컬러로 나오는 듯한데 이것도 확실친 않고 종횡비의 변화에 대해선 또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한 건지.
그리고 마릴린 먼로는 두어 번에 걸쳐 임신을 하고, 강제로 낙태를 당하거나 유산을 하기도 한다. 그 부분에서 뜬금 없이 등장하는 ‘태아’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무슨 성교육 비디오도 아니고. 참 난감하다(나중엔 상상 속에서 태아가 마릴린 먼로에게 말을 건네기까지 한다!).
어쨌든 이런저런 불우한 일들이 겹쳐 말년의 마릴린 먼로는 술과 약물에 의존하다가 급기야 사망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이 영화가 주인공을 과연 진짜로 존중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마음까지 들게 할 지경이다. 과연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원래 <블론드>의 영화화 기획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원작소설이 출간된 이후 제시카 체스테인, 나오미 왓츠 등의 배우들이 출연 물망에 오르기도 했는데 모두 엎어지고 이번에 넷플릭스가 제작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세상 빛을 보게 된 것. 그러면서 금발 가발을 쓰고 억양까지 고치는 훈련을 받아 열연한 아나 데 아르마스는 칭찬을 받을 만하지만… 영화 자체는, 갸우뚱.
‘마릴린 먼로에겐 유가족이 아무도 없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라는 점, 보기 전과 보고 난 후 참고하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