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무더웠던 며칠 전의 일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 대기에 걸렸는데, 갑자기 시동이 꺼지더니 배터리 경고등이 들어온 것. 깜놀했지만 곧 다시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목적지에 가서 일을 보고 돌아오던 중, 또 아까와 똑같이 시동이 꺼지고 배터리 경고등이 들어왔다.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니구나 싶어 차계부를 뒤져보니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배터리는 2020년에 교체한 걸로 적혀져 있었다. 2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배터리를 갈아야 되나? 혼자 생각을 하다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는 정비소까지 가게 되었다. 주말 늦은 시간이었는데 다행히 그 시간까지 그 정비소는 문을 열고 있었다.
조금 불편한(?) 상황은 그 이후부터였다. 정비소 사장님으로 보이는 기술자 분이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고 결국 배터리를 교체하고 또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면서 말끝마다 “사장님 차에선 이런 문제가~” 혹은 “사장님 차는 연식이 이러저러하니~”라는 식으로 ‘사장님’이란 호칭을 붙이는 것이었다.
사실 전 사장님도 뭣도 아니고, 오히려 사장님이 사장님 아니신가요(?), 라는 이야기가 목 울대까지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굳이 하진 않았고… 아무튼 차는 그렇게 수리를 마쳤다.
개인적으로 ‘사장님’이란 호칭을 처음 들어본 건 대략 30대 초반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동창이 부탁 반 꼬임 반 하면서 나를 데려갔던 모임은 모 다단계 사업자들의 모임. ㅡㅡ;; 다단계 사업자 모임은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모 대학 교수나 고위공직자 출신으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양반들이 기념사 혹은 축사 비스무리한,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으론 말끔하게 양복 정장을 갖춰 입은 젊은 사람이 사업 설명이란 걸 한다(그들은 이런 과정에서 무척 하이 텐션이기도 하고 다양한 우상향 그래프를 보여주기도 한다). 조금 규모가 큰 경우 행운권 추첨 같은 것도 하고 거의 마지막엔 몇몇 사람들이 조를 짜서 이른바 ‘분임조 토의’ 비슷한 걸 하게 된다.
바로 이 마지막 단계에서, 그 다단계 회사의 담당자가 반드시 끌어들여야 하는 신참(바로 그 때의 나 같은)에게 보여주는 말투가 바로 ‘사장님~’으로 시작하거나, 끝나는 말투. 그런 다단계 회사의 사업설명회 같은 자리에 오는 사람들 다수가 실제 사장님은 아닐 확률이 매우 높지만, 바로 그런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도 ‘사장님’ 호칭을 들은 적은 많다. 택시를 타도 사장님, 대리운전을 불러도 사장님, 치킨집에 전화로 주문을 할 때도 사장님, 동네 재래시장에서 과일 한 봉다리를 살 때도 사장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오히려 ‘진짜 사장님’으로부터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일이 많은 듯?
말하자면, 호칭의 인플레이션. 인플레이션이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와 같은 일종의 전이현상은 앞으로 더 나아가면 나아갔지 뒤로 후퇴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사장도 뭣도 아닌 사람을 ‘사장님’이란 호칭으로 부르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오셨습니다”나 “거스름돈 3500원 나오셨습니다”까지 갈지언정(물론 실제로 우리 사회는 ‘그런 곳’까지 갔다!), 갑자기 ‘아저씨’나 ‘아주머니’ 같은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언제부터, 그리고 왜 우리 사회에 ‘사장님’이란 호칭이 이렇게 넘쳐나게 되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장님이란 호칭은 상대를 높이는 표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전반적인 학력 수준이나 문화적 수준이 높아진 덕에 이런 표현도 가능해진 것이라고 우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호칭의 인플레이션도 굳이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시각도 존재하긴 한다.
그렇지만, 역시 사장님도 뭣도 아닌 나는 사장님이란 호칭을 들었을 때 왜 괜히 민망해지고 찜찜할까. 정확히 말해서 ‘사장님이란 호칭을 듣기 싫은’ 이유는 뭘까. 당연하지만 사장이 아니기 때문이고 ^^;; 그런 이야기 들어봐야 진짜 남 부럽지 않은 ‘사장님’ 들과는 1도 관련이 없는 내 삶이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글을 마칠까 하다가 또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평범한 시민의 삶과는 무관하게, 어쩌면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호칭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곳, 바로 검찰에 대한 생각.
검찰청은 대한민국 정부 직제상 법무부의 외청이고, 그 수장은 당연히 검찰청장으로 불러야 한다. 그런데 검찰청의 수장은 청장 대신 ‘검찰총장’이라 부르는 것이 관례. 호칭의 인플레이션이 권력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솔직히 자기들끼리 이렇게 부르면서 조금 민망하지 않을까 ㅋㅋㅋ 생각한 적도 있는데, 그쪽 동네 사람들한텐 그럴 일이 없을 게 틀림없다.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대통령이 된, 전직 검찰’총’장이 지금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