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매운 고추의 아이러니

Red Hot Chili Peppers 멤버들의 귀여운(?) 모습

예전에 레드 핫 칠리 페퍼스란 밴드를 정말 좋아했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얼터너티브 장르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펄 잼, 너바나 등이 인기를 얻을 때 그들보단 조금 전 세대인 RHCP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알려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개인적으론 초창기 시절보단 존 프루시안테가 한 번 탈퇴를 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낸 앨범 ‘Californication’과 그 이후의 ‘Stadium Arcadium’ 등을 좋아하는 편. 요즘도 가끔 들으면 피가 펄펄 끓던(!) 시절 생각이 난다.

하필 RHCP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얼마 전 전통시장에 장을 보러 갔다가 참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여러 농산물을 바구니에 담아서 싸게 팔던 그 가게에서 봤던 안내 문구가 유독 기억에 남았던 것: ‘안 매운 고추 한 바구니에 2천원’.

그러고 보면 어렸을 때 먹었던 고추는 으레 매웠는데, 특히 엄마가 종종 해주신 멸치볶음 안에 들어간 꽈리고추도 은근히 매웠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매운 맛에 취약한 터라 매운 고추에 대한 기억은 유독 강하게 남아있다. 요즘도 식당에 가서 밑반찬으로 고추가 나오면 “이거 매운가요?”라고 종종 물어볼 정도.

이 고추는 매운 고추일까요? 아니면 안 매운 고추일까요?

‘빨갛고 매운 고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에 관한 기억까지 소환한, ‘안 매운 고추’에 관한 이야기. 그런데 이른바 안 매운 고추 마케팅의 역사(?)도 나름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는 사실, 혹시 인지하고 계셨는지? <월간원예>에 올라온 2015년 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농산물 도매시장의 대명사인 가락시장에 처음 안 매운 고추가 등장했던 것은 기사 작성으로부터도 20년 전인 1995년. 그런데 이 때 출시된 고추는 전체 중에 꼭지 부분에 해당하는 약 1/3 지점엔 매운 맛이 여전히 남아있는 ‘어중간하게 매운’ 맛이어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인 2005년. 가락시장에 다시 등장한 ‘안 매운 고추’는, 맵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육이 두껍고 수분이 풍부해서 생으로 먹기 좋다는 평가를 받았고, 씹으면 아삭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여서 이른바 ‘오이맛 고추’로 통했다고. 바로 이 품종이 오늘날까지도 그 별명으로 통하는 품종, 정식 명칭 ‘길상(BN54)’ 품종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0년엔 더욱 안정적인 재배가 가능해지고 맛도 더욱 순화된 ‘순한 길상’이 출시, 생식용 풋고추 시장에서 60%의 점유율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도 있는데, 그렇게 고추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잃은(?) 상품이 시장에서 많은 선택을 받는다는 건 소비자의 취향이 그만큼 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건강을 생각해서 덜 자극적이고, 조금은 심심한 음식을 선택하는 소비자들의 의식 변화도 안 매운 고추 인기에 한 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그와는 정 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바로 매운 맛 음식의 인기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이어진다는 것. 아주 매운 낙지볶음, 곱창전골, 닭발 같은 음식들은 과거에도 인기가 있었는데 최근 들어선 여기에 현지에서도 소수의 마니아들만 선호한다는 마라탕 같은 음식들까지 특히 젊은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중.

해외에서 ‘한국 음식은 맵다’는 인식이 생각보다 널리 퍼진 듯

이에 대해선 근년에 이어진 경기침체,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 등으로 짜증 지수가 올라갈 대로 올라간 사람들이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매운 맛 음식을 소비했기 때문이란 시각이 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 먹방 유행을 타고서 이른바 괴식, 즉 여러 가지 측면에서 희한한(?) 먹거리를 먹는 행위 자체를 무슨 미션 클리어 하듯 ‘해치우는’ 이들에 대한 관심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어쨌든 참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모름지기 고추는 매운 맛으로 먹는 음식일 텐데, 품종개량으로 매운 맛이 제거된 고추가 소비자들의 선택을 통해 높은 시장 점유율을 보이는가 하면, 한 켠에선 눈물콧물 쏙 빼놓는 매운 맛 음식을 또 대기까지 타면서 먹는 광경이라니. 이미 기원전에 문학에서의 아이러니를 조명한 아리스토텔레스가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보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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